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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었다

[만두 가게 앞에는 싱크홀이 있다 - 임선우] 매일을 여행 같이

by 헌책방 2022. 9. 5.


[만두 가게 앞에는 싱크홀이 있다 - 임선우] 매일을 여행 같이


언덕 위에서 내려다 보이는 덩케르크가와 몇 번 와본 적도 없는 공원이 어쩐지 애틋했다. 생애 세 번째 파리여행 중이었고 그때는 겨우 이틀째 체류 중이었으므로 나와 파리의 역사는 겨우 일주일 조금 넘게 쌓여있을 뿐이었지만, 바꿔 말하면 나는 파리 일주일 살기를 체험해 본 셈이었다. 부지런한 관광객들과 주민들이 벌써 몽마르트르를 오르고 있었다. 더운 숨 끝에 전날 밤 마신 와인 향이 생생히 맴돌았다.




여행자로서의 나의 신조는 한결 같았다. 관광(볼 관 觀, 빛 광 光)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그네(나그네 려 旅)처럼 흘러들어가(다닐 행 行) 사는 것처럼 머물다 원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 그것이었다. 습관처럼 비행기에 오르던 시절에는 바쁜 일상에 쫓기고 있었고, 무엇보다 업무와 학업 외에는 워낙 즉흥적인 타입이라, 미루고 미루다 출국일 아침에 부랴부랴 트렁크를 싸 들고 공항으로 향할 때가 많았다. 출발시간에 겨우 시간 맞춰 달려가 좌석에 앉으면, 여행 계획도 없고 캐리어도 빈약한 탓에 초조한 마음이 일렁였다. 그러나 곧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인데 여권이랑 카드, 그리고 튼튼한 몸뚱이만 있으면 된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책을 펼쳤다. 아무거나 생각나는 대로 트렁크에 물건을 집어 넣어 가는 바람에 여행 메이트들이 내 가방을 랜덤박스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고정적으로 트렁크 안을 차지하고 있는 몇 가지 필수품만 있으면 여행은 늘 무탈히 마무리 되었다. 적어도 이전 여행이 끝나고 세탁 후 넣어둔 모자, 스포츠브라, 레깅스, 러닝화 세트는 트렁크 안에 있을 것이었다.



 

서울에서의 내 삶에서 아침 조깅은 꿈도 못 꿀 일이다. 야근, 회식, 데이트, 약속이 잦은 데다가 아침 잠도 많은 사람의 출근시간 대에 달리기가 들어갈 자리는 없다. 가끔 새벽에 인적이 드문 서울을 달리기도 했지만, 일상이라 부를 만큼 비중을 늘리지는 못했다. 대신 나는 여행지의 새벽을 달렸다. 낯선 곳에서 아침 조깅을 하거나, 아침밥을 먹고 수영을 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평범한 일상(날 일 日, 떳떳할, 항상 상 常)을 체험했다.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볕이 잘 드는 노천 카페에 앉아서 커피나 술을 마시고, 그 지역에서만 파는 담배를 피우며-흡연자는 아니지만, 다른 나라에 가면 그 나라를 대표하는 술 한 병을 곁들여 담배 한 갑 정도는 피워본다-, 독서했다. 박물관과 미술관에 가서 작품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라, 멀찌감치에서 언제든 또 볼 수 있을 것처럼 작품을-속으로 조금은 초조해하면서-지긋이 바라봤다. 그리고 다시 원래의 삶으로 돌아오면, 콕 집어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늘 똑같고 바쁜 내 생활이 예전보다 특별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여행지에서 현지인처럼 살아 보는 여행은, 파리에서 쿤데라를, 피렌체에서 단테를 읽으며 가만히 서울에서의 생활을 돌아보는 나 스스로 뿐만 아니라, 일상이라고 부르기에 다사다난한 내 생활까지 위로해 주었다.



삶은 지독한 아이러니고 농담이고 모순이기 때문이어서인지, 특별하고 새로운 것의 모양 속에는 평범해서 지나치기 쉬운 것들이, 그냥 지나쳐버린 평범한 외양의 존재들 속에는 특별하고 새로운 의미들이 깃들어 있다. 여행을 떠난다든지 하는 특별한 계기나 그 속을 들여다보고 의미를 발견하려는 무용한 노력이 없으면, 외양을 바꿔서라도 자신을 알리려던 평범하지만 소중한 의미들은 그냥 쉬이 사라져버리고 만다. 예스 24 최근담 시리즈의 다섯 번째 이야기인 임선우 작가님의 <만두 가게 앞에는 싱크홀이 있다> 도 평범해 보이는 것에 깃든 소중한 의미와, 특별해 보이는 외양 이면에 존재하는 일상성을 조명한다. 특히, 특별해 보이는 것에 제멋대로 대단한 의미를 부여해놓고, 그것이 생각만큼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부터 순식간에 그 존재가치를 절하해버리는, 자기 중심적 인간의 사고방식에 대해서 생각해 볼 만한 질문을 남긴다.

 

주인공은 특별할 것도, 주목할 것도 없는, 회사와 집만 오가는 평범하고 단조로운 생활을 하고 있다. 어느 날, 엄청 맛없다고 생각했던 동네의 한 만두가게 앞에 거대한 싱크홀이 생긴다. 그는 호기심이 생겨 싱크홀을 구경하러 갔다가 공허하고 깊은 공간이 보여주는 어둠에서 죽음, 긴장, 불안을 느낀다. 그는 오히려 어두운 이미지에서 자신이 살아있는 존재라는 안도감을 느낀다. 그리고 인생을 뒤흔들 거대한 사건은 갑자기 찾아온다는 것에서 자신의 고요한 생활이 갖는 이면적 의미를 발견하고 위로를 받는다. 그는 인적이 드물어지는 새벽마다 '자신의' 싱크홀을 구경하러 가던 어느 날, 싱크홀 안에서 두더지 무리가 모습을 드러내고 그대로 죄다 만두가게로 들어가는 모습을 목격하고 아연실색한다. 도저히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는 만두가 사실 두더지들에게는 특급 야식이었고, 인기 없는 만두집은 특급 맛집이었다. 두더지들이 계속 산삼을 들고 찾아와주었기 때문에 인간의 입맛에 맞지 않는 만두를 파는 그 식당이 망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는 얼결에 두더지들과 함께 맛없는 만두 한 접시를 다 비우고, 가게 밖으로 나와 싱크홀을 바라본다. 그는 싱크홀을 바라보며 만두가게의 지름길이라니, 그 의미가 하찮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곧 평범해 보이는 일상에도 여러모로 이면이 있다는 사실을, 싱크홀이 준 배움을 되새기며 생각을 고쳐 먹는다. 며칠 후 싱크홀은 메워진다.

 

 

본작은 같은 시리즈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감상에 십분도 걸리지 않는 짧은 분량에 비해 작품이 갖는 의미가 상당히 다채롭다. 발생 원인을 알 수 없고 쉬이 볼 수 없는 것이라는 이유에서, 대단하고 신비로워 보였던 싱크홀의 이면에는 두더지들이 야식을 먹으러 가는 지름길이라는 의미가 숨어 있다. 그 순간 싱크홀은 인간에게 심오하게 기능하는, 어둠과 죽음이라는 기존의 의미는 상실하지만, 야식 맛집으로 가는 길이라는 두더지들에게 있어서 매우 특별한 의미를 획득한다. 맛 없고 흔해 빠진 동네 만두집은 하루 종일 어둠 속을 활기차게 돌아다니느라 진이 빠진 두더지들의 피로를 달래주는 특별한 맛집이 된다. 누군가에게 특별한 것이 아니라고 해서 그것이 정말 특별하지 않은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에게 특별한 것이라고 해서 그것이 모두에게 특별한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일상적인 것이라고 해서 그것이 특별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다. 인간에게는 죽음, 긴장, 불안이었던 어둠은, 두더지에게는 일상이자 평상이다. 작고 조용하고 땅 밑에 숨어 있다고 해서, 두더지가 갖는 존재 가치의 무게가 인간보다 가벼울 수는 없다. 본작은 우리가 눈에 보이는 현상에 집중한 나머지, 현상의 숨겨진 이면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 타인이 현상에 가질 수 있는 나와는 다른 생각에 대하여, 얼마나 무감하게 대하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더불어 반복 되고 있다는 이유에서 그저 흘려버리는 우리의 오늘들이, 찰나가, 그 자체로 얼마나 특별하고 의미 있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되새기게 한다.


여행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보면, 흐릿한 풍경들과 낯선 관광 포인트의 부정확한 이름들 사이로, 새벽에 뛰었던 인적 드문 여행지의 풍경이 가장 진하게 남아 있다. 카메라를 통해서 보거나 카메라에 담겨서 카메라 렌즈를 보다가 스쳐 지나간 풍경이 아니라, 일상으로 스며든 보통의 풍경들이 가장 특별하게 갈무리 되어 있다는 것이 그 순간을 더 없이 소중하게 여기게 한다. 기억을 통해서만 아침을 뚫는 발걸음 소리와 멀찍이 하루를 시작하는 일상의 풍경을, 그 소중한 오늘을 돌아 볼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일상이 여행자였던 내 눈에 특별해 보였듯이, 내게는 일상적인 일들이 누군가의 눈에는 다른 의미를 품을 수 있다는 것이 나를 늘 설레게 한다. 그러니 어떤 풍경과 어떤 존재 앞에서도, 쉬이 '그것은 어떻다'라고 판단하지 않고, 나와 다른 관점에 '그렇지 않다'라고 대답하지 않아야지. 그저 옆에 앉아 그렇구나. 이야기하고, 그렇구나. 하는 대답을 들으며, 밝아오는 아침 해가 조금씩 더 머리 위로 높이 등산하는 것을 바라봐야지. 홀로 다짐했다.

 




파리에서 조깅으로 아침을 열었던 그 날, 몽마르트르에서 뛰어 내려오다가 신호등에 서 있는데 어떤 노부부가 길을 물었다. 현지인이 아니라서 길을 잘 모른다고 부연하며 구글 맵을 켜고 검색해 보니 걸어서 20분 거리에 있는 곳이기에 산책 겸 잠깐 그들과 동행했다. 미국에서 여행 왔다는 노부인이, 행선지였던 르 빵 꼬디디앙에서 보답이라며 빵 한 봉지를 선물했다. 집에 가서 테라스에 앉아 책을 읽으며 대충 탄 커피에 곁들여 뜯어 먹었던 그 빵 맛은 평생 기억에 남을 진미였다. 특별한 것이 평범해지고 평범한 것이 특별해지는, 순간의 경계를 넘나 들었던 마법적인 순간이었다. 팬데믹 이후 무작정 여행을 떠나고 싶어질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그 어제와 똑같았을 어제와, 어제와 똑같은 오늘일지라도, 오늘은 특별하다고. 여행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친절한 마음을 나누는 사람들과 평소에 만날 수 없는 특별한 환경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여행하는 나의 마음에 달려 있다. 오늘을 여행처럼, 매일을 여행 같이, 특별한 날로 만드는 것은 오늘을 사는 나다. 오늘 밤은 벌써 풀벌레 소리가 가득한 동네 공원을 한 바퀴 뛰어야겠다.

 

* 예스 24 북클럽 덕분에 전자책으로 읽어서, 책과 관련한 이미지가 없기 때문에, 최근에 다녀온 양양여행 사진을 풀어보았습니다 :) *



동호해변 진짜 풍광 예술이었어요. 제일 깨끗했고!

저의 양양 원픽 바다는, 동호해변!

 

 

 

그리고 매너리즘 오기 쉬운 페스티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늘 신나게 사진 찍어놓고 이런 말 하는 것이 진짜 웃기기는 한데, 어떻게 하루를 보내고 어떤 마음가짐으로 비슷한 나날을 대하느냐가 중요하다는 측면에서 마냥 즐겁지만은 않을수도 있는, 온전히 내가 주인공이 되기 어려운 자리 중 하나입니다. 노는 것도 최선 보다는 충실히 :) ㅋㅋㅋ

 

 

퇴근 길에 본 풍경. 하루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오늘을 보내는 각자의 손 끝에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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