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경이] 부디 당신부터 행복하기를
울산지법 2019고합241 판결문 발췌
우리 사회는 철저히 타자의 불행을 개인의 문제로만 국한하고 축소시킨 다음, 외부로 드러나지 않게 밀봉해 온 사회다. 설령 한 개인이 열등하고 못나서 그와 같은 처지에 빠진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를 잘라내고 도태시켜서는 안 된다. 개인의 능력 때문이든, 환경 탓이든, 그 어떤 이유에서든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을 못 본 척 할 순 없다.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생존방식은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몇몇 사람을 집어삼키는 블랙홀이 우리 주위에 존재한다면 우리 모두가 그곳으로 빨려 들지 않으리라는 장담 역시 할 수 없다. (중략)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일은, 혼잣말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
인류는 수없이 많은 양립 불가능한 선택지 앞에서 한가지를 선택하면서 살아왔다. 혹은 선택을 포기하고 도태되어왔다. 매일 빨간약과 파란약 앞에서 갈등했고, 내가 살기 위해 다른 배 한 척의 폭탄을 터뜨릴 기폭장치를 누르느냐 바다로 던져버리느냐 사이에서 괴로워하며 버텨야했다. 정도와 스케일에 차이가 있을 뿐이지 돌아보면 인간의 일상이 벤담의 공리주의와 칸트의 의무론에서 자유로웠던 순간은 한 순간도 없다. 다수의 행복을 위해서 소수를 불행하게 하는 것은 과연 옳은가. 대의명분이 절대적으로 옳고 선하다면 그 수단은 부당해도 괜찮은가. 겨울 냄새가 가득한 아침, 알람 소리를 듣고 눈을 뜨고 애써 몸을 움직여 씻고 하루를 여는 평범한 사람들이, 매일 소리 소문도 없이 찾아오는 이 치열한 고민 앞에서 조금씩 세상을 바꾼다. 그리 선하지도, 그리 악하지도 않은 보통 사람들이 대단한 이유다. 나아가 그리 선하지도 대단하지도 않은 사람이 소외된 타인에게 손 내미는 선택으로 인해 영웅으로 기억 되는 이유다.
최근 몇 달 동안 토요일, 일요일 저녁을 설레게 해준 드라마 두 편이 지난 주말 종영했다. 바로 <구경이>와 <지리산>인데, 나를 설레게 한 이유는 다르지만 어쨌든 두 드라마 모두 아쉽다는 세간의 평가와 달리 나로서는 볼만한 컨텐츠였다. 특히 <구경이>는 요즘 같이 컨텐츠가 어디에나 넘쳐나는 세상에서 누구에게나 좋은 텍스트를 쓰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지, 완벽하지 않은 텍스트라도 누구나 만족시킬 수 있는 작품은 아닐지라도, 소수에게라도 좋은 작품으로 남을 수 있다면 그 또한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하는 작품이다. 그러니까 나처럼 이런 엉성한 리뷰를 쓰는 사람에게 엉성하더라도 이대로 괜찮다고 위로해 준 셈이다. 적어도 나 한 명은, 많은 고민을 하고 잠 못 이루고 뒤척이며 작품을 감상하고 여러가지를 고민했으니까.
<구경이>는 이영애가 오랜 침묵을 깨고 브라운관 복귀작으로 선택한 작품이다. 구경이라는 2020년대 한국판 셜록 같은, 불완전하지만 비상하고, 빈틈 없는 예측력을 보여주지만 결정적인 순간 한 구석이 허술할 때가 있는 캐릭터를 통해,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 중 <친절한 금자씨>가 가장 충격적이었던 이유의 주인공이 본인의 이미지의 반전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이영애 외에도 김혜준, 김해숙, 김수로 같은 시청자들이 잘 아는 얼굴이 새롭고 뛰어난 연기를 선보이고, 곽선용, 조현철, 정석용, 최대철, 박지빈 같이 시청자에게 익숙한 얼굴이 역시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며, 곽선영, 백성철, 이홍내 같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새로운 얼굴을 발굴하면서 연기력 구멍 없는 라인업을 완성한다. 김해숙 배우의 악역 연기는 <아가씨>에서 워낙 인상적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평소의 부드러운 이미지 때문인지 여전히 새로웠다. 아무래도 드라마의 가장 효과적인 도구는 배우들이다 보니 기본적인 힘은 갖추고 시작한 셈이고, 드라마의 효과적인 도구인 배우들을 발굴하고 새로운 면모를 선보이게 했으니 수확은 있다.
배우 라인업이 좋으면 캐릭터들도 힘을 받을 수 밖에 없다. 구경이를 주축으로 하는 구경이 팀, 구경이, 나제희, 산타, 경수는 남녀 2명씩, 40대(추정)부터 20대 초반(추정)까지 성비, 나이대가 균형 있게 잡혀 있고 각자 캐릭터가 주변에서 보기 힘들 정도로 뚜렷한데, 또 생각해보면 이런 애 한명씩 떠오르기도 해서 평범해 보이기도 한다. 한 팀으로 두고 볼 때 산만하지 않아서 케미가 괜찮다. 웃길 때도 많고, 보험회사 조사관을 중심으로 구성해서 그런지 현실감도 그리 많이 떨어지지는 않는다. 케이를 주축으로 하는 케이팀, 케이와 건욱도 사이코패스와 조력자이기 때문에 보다보면 정유정 소설을 읽는 것 같고, "아니 인간이 이런다고? 이렇게 생각한다고?" 싶다가도 "그래 유영철 같은 사람도 있었지. 그럼 있을 법도 하고, 아 근데 이럴 때는 000이 생각난다고?(미안하니까 뜬금 없이 카톡 전송)" 하게 되는 일종의 평범함이 있다. 둘 역시 외적, 오랜 세월 살인을 함께 해 온 짬에서 쌓인 내적 케미가 상당하다. 마지막으로 악을 축출하려고 하지만 사실은 악의 주축인 용숙팀, 용숙, 김부장, 허성태, 허현태, 헐겁지만 고담은 개개인의 기량은 뛰어나지만 저마다 지나치게 뒤틀린 면모가 있고 긍정적 내지는 유쾌한 케미가 전혀 발생하지 않아서 보기 힘들면서도 '그래야 마땅한' 특성을 가진 팀이라 또 금세 수긍이 가게 된다. 완벽한 상명하복 구조에서 다른 두 팀 같은 케미가 발생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목적이 분명한 팀들을 조직하고 그 안에서 개성 있는 캐릭터를 구성하면서 비록 좁고 설득력이 높지는 않지만 나름의 세계관이 형성되고, 특히 구경이 팀의 구성은 부족한 점이 있는 사람끼리 손을 잡고 거대한 흑막에 도전하고 나름의 성공을 거두는 과정에서 연대의 중요성에 대한 메시지 전달까지 수행한다. 중요 캐릭터들을 여성들이 차지하다 보니, 유행처럼 번지는 pc(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의무감이 이유는 아닌가 하는 의심이 가기는 하지만 장르적 특성상 필수적으로 발생하는 물리적 충돌에 있어서 제한적인 스케일, 누구 하나 평범 이상으로 착하거나 정의감 넘치는 여성은 없다는 점, 무엇보다 플롯과 캐릭터의 유기적 관계를 따져 봤을 때 성별을 불문한 모든 캐릭터가 성별을 포함한 부여된 특성이 아닌 다른 특성을 부여 받은 모습이 직관적으로 상상가지 않고, 인위적으로 다른 특성을 부여해서 나름대로 상상해봐도 현재 특성 보다 나은 시뮬레이션 결과를 얻기 힘들기 때문에 ,여성 중심으로 짜려고 일부러 만든 판이라거나 대세 내지는 트렌드를 따르기 위해 페미니즘을 이용했다거나 앞서 말한 컨텐츠 제작자로서의 의무감이나 압박감 때문은 아닌 것 같다. 요약하자면 철저히 이야기를 위해 여성 중심의 캐스팅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또한 <아가씨>로 상징 되는 대한민국 영상문화 젠더 감수성의 변곡도 일조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물론 건욱이 게이라는 설정과 제희가 미혼모라는 설정에 소수자 존중에 대한 압박감의 흔적이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이 설정들도 케이의 감정적 고립이라는 결과와 건욱의 부캐 활동과 직업적 환경, 제희와 용숙팀의 연계점 형성과 정치 풍자라는 목적에 따라 의도된 바긴 하지만 이 목적도 극에 무조건 필요한 요소였는지에 대하여 의문이 남는다.
드라마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도 여성 중심이라기보다는 인간이라면 겪을 수 밖에 없는, 의무론과 공리주의 사이에서의 딜레마와 목적과 수단의 정당성에 대한 고민이 돋보인다. 최대 다수의 행복을 달성하기 위하여 소수의 안위와 심지어 목숨은 희생되어도 괜찮은가, 대의명분을 이룩하기 위해서 부당한 수단이 사용되어도 좋은가, 선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동반되는 방법이 악하거나 부당하다고 해서 이행을 포기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도덕적으로 올바른 방식을 추구하는 것이 신념과 가치관에 따른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주어진 의무에 따른 결과여도 인간에게 유의미한 가치가 있는가, 행동을 하는 사람의 동기가 선의라면 결과와 무관하게 그의 행동이 선한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가, 소수의 불행을 먹이 삼아 자란 다수의 행복이 과연 진정한 행복의 총량 증가로 직결될 수 있는가와 같은 인류의 오래된 고민과 스스로에게 던져온 질문이 형태를 달리하면서 에피소드에서마다 반복된다. 또한 죄를 지은 자는 죽어도 마땅한가, 단죄의 방식이 규범이 약속한 통일된 기준을 따르지 않아도 괜찮은가 같은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트릴로지, 최근에는 연상호의 <지옥>을 계기로 활발히 이뤄졌던 정의 자체와 정의 실현의 의미에 대한 논의가 보다 가볍지만 집요하게 이어진다. 그런 면에서 죄를 저지른 자들을 죽여버리는 연쇄 살인마 케이가 어렸을 때 상처 때문에 사이코패스적 기질이 발현된, 정신적인 문제가 있고 심정적으로도 결여가 있는 캐릭터로 그려지는 부분은 아쉽다. 케이가 추구하는 바가 그녀가 정신병자라고 해서 정확히 전달되지 않거나 고민이 얕아지는 것은 아닌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겠으나 케이가 신념에 의해 작동되는 인물이었다면 구경이의 신념과의 대립을 통해 보다 깊은 고민, 논의가 가능했으리라고 생각한다. 작품에는 지금 당장 우리가 가치 판단하여 취할 것만을 선별할 수는 없지만, 어떤 것이 더 중요한지 다만 생각해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의미가 있으며, 이 순간에마저도 우리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는, 플라톤의 선의 이데아에 대한 논의 이래 진정한 '선'에 대한 전세계 철학자들의 화두가 캐주얼하게 녹아 있다.
연출도 뛰어나진 않지만 볼만하다. 추리물이라는 낯선 장르적 특수성을 게임과 연극의 요소와 결부시켜 조금 더 다가가기 쉽게 연출한 부분이 인상에 남는다. 추리 장면이 아예 연극 무대 위에서 이뤄지기도 하고, 기차, 교실 등 다양한 장소에서 핀 조명, 방백, 독백 등 연극 요소가 끊임 없이 개입한다. 케이의 살인 장면에서 조곤조곤 잔인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크게 자극적인 장면은 없지만 이야기 자체는 잔혹하고 연극적이다. 케이가 살인을 위한 스토리를 구성할 때도 희곡을 적극 활용하고 이것을 화면에 잘 녹였다. 살인의 핵심 내용을 연극의 한 장면으로 예고하기도 하고, 무대를 이루고 있었던 상징적 장치가 살인 내지는 위협에 쓰이기도 한다. 경이의 게임 중독이 극 전반에 비주얼적으로 연장, 구현 되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웠다. 물론 연극과 게임이 개입 시키다보니 현실성과 개연성이 확연히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종종 드라마나 연극만큼이나 판타지에 가깝고 비극적인 것이 삶이다. 그러니 잠깐은 삶보다 판타지에 가까운, 해피엔딩 연극이 필요하기도 하다. 연극이 끝나고 나서도, 삶은 계속 된다. 무릇 숨 쉬는 존재라면 아무리 괴롭더라도, 매일이 낯선 비극이더라도, 삶을 포기할 수 없다. 삶은 계속 된다. 풀릴 수 없는 수수께끼와 정답이 정해져 있지 않은 생각들을 가득 안고. 그러니 행복하자. 행복이 10을 채우고 11이 되는 순간, 옆에 앉은 이의 손에 행복을 나눠주자. 느슨하지만 분명한 이 연대를 잊지 말자. 혼잣말 하고 있지 않도록 손을 잡아 주자. 누군가의 혼잣말을 들을 수 있도록, 그래서 뻗어 잡은 손이 흔들리지 않도록, 누군가 이기적이라고 손가락질하더라도 견디며, 당신이 일단 나부터 행복하겠다는 마음에 한 점 짐이 없기를. 부디 당신부터 행복하기를.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