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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봤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지옥 ] (후기 1) 어쩌면 여기가

by 헌책방 2021.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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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여기가 <지옥>

엄마랑 식사를 마치고 나와서 바라 본 하늘. 부분 월식이 진행중이었다.


작은 고장에서 귀여운 딸 아이가 배우고 싶은 것은 배우게 하고, 하고 싶은 것은 하게 하고, 그만 두고 싶은 일은 그만 두게 하면서 육아에 전념하는 한 어머니가 있었다.
어느 날 미술 학원에 간 딸 아이는 눈물에 녹초가 되어 젖은 찐빵처럼 찐득해져서 돌아왔다. 아이는 대문을 박차고 들어서며 말했다.
"엄마 나 미술 학원 그만 둘거야."
아이가 미술 학원에 다닌지 3일째 되는 날이었다. 지난 주에는 아이가 김치를 먹이고 낮잠을 억지로 재운다는 이유로 어린이집을 그만둔터였다. 엄마는 울먹이는 딸을 다독여 스케치북을 펼치게 했다.
"무슨 일 있었어? 학원에서?"
아이가 펼쳐든 스케치북에는 온통 빨간 색 얼굴을 한 허수아비가 황금빛 들녘 한가운데에 서있었다.
"엄마. 허수아비 아저씨가 하루 종일 들에 서있어서 얼굴이 빨갛게 탔는데, 선생님이 허수아비 얼굴을 살색으로 칠하라고 했어. 다시 가기 싫어."
어머니는 미술 학원에 전화했다. 학원 선생님은 말했다. 아이에게 상처를 줘서 미안하고, 아이를 학원으로 보내준다면 실수를 만회하겠다고.
"아이에게 물어보셨나요? 왜 얼굴을 빨갛게 칠했는지?"
선생님은 어떤 이유로 빨갛게 얼굴을 칠했는지 몰랐다고 대답했다. 끔찍한 상상을 했고, 또 금방 대수롭지 않게 감각 없는 아이라고 생각했으며, 그러고 나서는 물어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고. 상상력을 억압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어머니는 아이를 다시는 미술 학원에 보내지 않았다.
아이는 자라 다른 색깔 허수아비의 얼굴들을 보고도 나름의 이유가 있을거라고 짐작하는 청년으로 자랐다. 이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이 소망인 청년이.

 

누군가 카톡방에서 감상을 물어봐서 대답하기

<지옥>은 주제적으로 사회의 다양한 문제점을 조명하며, 우리가 처한 현실과 다른 작품들과 엮어서 생각해볼만한 문제의식이 많고, 많다고 해서 그 깊이가 얕지도 않은 작품이다. 대표적으로는 정의란 무엇이고, 인간이 정한 기준의 정의로움의 적정성은 어느 지점이며, 모두가 동의하는 통일된 기준을 정할 수 있는가와 같은 뼈있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원작인 웹툰은 연재 당시 꽤 호평을 받았는데, 나는 웹툰을 보지는 못했기 때문에 비교가 불가능해서 아쉬웠다. 다만 작품을 같이 감상했던 동생이 웹툰을 봤다기에 웹툰과 비교했을 때의 감상을 부탁했더니, 몇 가지 설정 빼고는 웹툰 장면을 똑같이 옮겨 왔으나 흡입력은 웹툰에 비해 떨어진다는 대답이 돌아와서, 원작을 그대로 다 영상으로 옮기는 것도 의미가 있겠으나 기획 단계에서 영상매체물 특성상 몰입에 방해 될만한 요소나 현실적으로 연출이 어려운 요소, 뉘앙스가 구현되기 어려울만한 요소는 걸러내는 작업이 필요하지 않았나 짐작했다. 동생이 말한 상대적으로 흡입력이 떨어지는 포인트가 어딘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어 아쉽다. 기회가 되면 날잡고 웹툰도 읽어보려고 한다. 원작과의 관계를 떠나서도 연출과 연기에 대해서 아쉬운 점들이 꽤 많았다. 그러나 생각해볼만한 메시지가 많고, 연기나 연출, CG 기술력을 지적하기엔 관련 인사이트가 얕기 때문에 아쉬운 점보다는 메시지 측면에서만 집중해서 리뷰하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사라고 불리는 존재가 사망을 앞둔 자에게 지옥에 갈 시각을 고지하는 장면과 은표의 연기는 정말 매번 아쉬웠다.)

 

누군가 디엠으로 의견을 이야기하길래 나도 함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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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로 생각해볼 주제는 현상과 의도다. 정보만큼 흔한 것도 없지만 정보만큼 귀한 것도 없는 사회에서, 정보의 선점이 (그것이 우연일지라도) 현상에 대한 분석 결과의 공신력으로, 현상을 만든 초월적 존재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고, 나아가 현상을 이끌거나 초월할 수 있는 능력으로 비약 되고, 결과적으로 정보 선점자가 어떤 텍스트를 어떻게 해석하더라도 그 해석이 사회적으로 힘을 갖추고 능동적으로 영향력을 펼치게 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보를 선점한 집단이 특정 '의도'를 두고 텍스트를 오용할 수 있으며, 오용이 반복되다보면 어느 순간부터 텍스트는 본디 의도와 관계 없이 대중을 억압한다는 측면에서 폭력적인 것이 된다. 몇날 몇시에 상대방이 지옥에 간다고 고지하는 기괴한 모습의 존재의 고지와 고지 내용대로 예고된 시각에 나타나 지옥에서 겪을 수 있을만한 고통을 겪으며 지옥과 마주하게하는 정체불명 존재들이 휘두르는 폭력, 이 유례 없는 현상의 존재를 새진리회 의장 정진수는 먼저 몸소 겪고, 또 다른 사람들이 고통 받으며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정진수는 현상을 자신의 방식대로, 또 자신이 의도하는 사회의 방향에 맞춰 사회 구성원이 자율적으로 컨텐츠의 의도를 오인하도록 치밀하게 유도한다. '정의롭지 못한 자, 불의를 행한 자, 죄를 지은 자들은 지옥에 가게 되기 때문에, 고지를 받고 지옥에 가지 않으려면 인간은 더 정의롭게 살아야한다'를 의도하기 위해 사망 시각을 고지하는 기괴한 홀로그램은 '천사'로, 정체불명의 존재들이 휘두르는 폭력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사악한 자들에게 내리는 형벌이자 지옥행을 집행하는 '사신'들의 '시연'으로, 시연을 받는 대상자는 '죄인'으로 명명하고, 장시간, 파급력 있는 매체를 동원하며 홍보한 끝에 자신의 명명이 대체불가능하게끔 만든다. 그리고 이 이름현상의 의도와 원인을 파악하는 대중들에게 있어 첫인상, 존재가 갖는 의미의 함축으로 기능하며, 극소량의 정보만으로 쉽게 현상을 파악할 수 있다는 성취감을 원동력 삼아 깊은 생각 없이 현상을 오해하도록 유도한다. 심지어 이런 기본작업은 텍스트를 독해하는 독해 주체가 자신의 특성에 맞게 텍스트를 오해하게 만들면서 기능적 범위를 스스로 넓히는데, 작품 내에서 엄마 잃은 딸에게는 폭력과 죽음이라는 결과가 심판의 방법으로 해석되며, 갓난 아이를 낳은 어미는 신생아 속에도 죄의 씨앗이 있을 수도 있다는 의심을 하게 되는 것이 그 예다(한국 사회 현실에서의 예시는 정보 공급자의 객관성을 100프로 담보할 수 없기 때문에 생략한다). 현상에 대한 정보의 선점과 의도의 왜곡 내지는 의도의 해석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은 언론의 역할과도 깊은 연관성이 있다. 시사 프로그램(뉴스)에서의 정진수와의 인터뷰, 기자(여기서 형사는 기자를 대놓고 기레기라고 비난한다.)의 취재 시도에서 보이듯, 1인 미디어를 포함한 언론의 관심은 텍스트 해석의 진위 여부 판별이나, 현상을 일으킨 초월적 존재의 의도의 심층적 해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정진수 의장과 새진리회가 주장하는 신의 의도에 대한 빠른 전파(이 와중에 정보의 선점), 확대 재생산에 있다. 신의 방식은 무조건 옳은가, 신의 방식이라면 무차별적 폭력, 집행에 앞둔 피고인의 변명 기회는 생략되어도 과연 괜찮은가. 현상의 해석에 대한 근본적 물음 없이, 초월적 존재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이 없고, 그저 현상 앞에 무기력한 나약한 인간은 비판 없이 현상에 대한 해석을 수용하고야 만다. 아기는 할 수 있는 일이 우는 것 밖에 없어서, 아프다고, 살려달라고 운다. 거대한, 불가해한, 대응 불가한 현상 앞에서 인간은 아기와도 같다. 그러나 나약하기 때문에, 현상의 해석의 주체이지 현상의 창조자가 아니기 때문에, 더더욱 인간은 현상 앞에 저마다의 해석을 내놓아 해석이 서로 충돌하게 하며, 정보를 선점한 자와 후에 점한 자가 공평하게 의견을 내놓고 토론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 그것이 인류가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인간들의 집합체임에도 멸종하지 않고 생존해 온 방법이고, 앞으로 밟아야 할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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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부터는 다음에 적어보기로 한다. 현재 시각 월요일 새벽 한시로 매우 피곤하다. 두번째 이야기는 곧! (자율성이 없는 인간의 비겁한 변명... 인간의 자율성에 대한 논의도 주제 의식 중에 하나였는데 글의 얼개를 짤 때 그 부분은 전혀 다룰 생각을 못한 이유가 바로 내가 인간에게 주어진 자율성의 부정적 케이스이기 때문이다ㅋㅋㅋㅋㅋㅋㅋㅋ그 부분에 대한 생각은 인스타그램 댓글을 참조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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