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힘은 연대에서 온다 / <듄>
<사막> 오스텅스 블루
그 사막에서 그는
너무도 외로워
때로는 뒷걸음질로 걸었다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
인간을 외롭게 만드는 것은 인간이다.
인간을 외로움 속에서 두렵게 하는 것은 인간이다.
인간을 두려움 속에서 파멸하게 하는 것은 인간이다.
욕망은 힘이 세서 메마른 가슴에도 금세 싹을 틔우고
구름 한 점 없는 어느 날 자신을 불태운다.
한 줌 재가 되어도 땅에 스며들어 땅의 일부가 된다.
대기와 강을 돌고 돌아 다시 씨앗이 되어 돌아온다.
그럼에도 사막을 걷고,
그럼에도 다 타버린 길 위를 걷는 것이 또한 인간이다.
그 사막에서 너무도 외로워 때로는 뒷걸음질로 걸을지라도.
개봉일 오픈런을 스토리에 인증했더니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은 "재미있냐?"였다.
나는 모두에게 "재미있다기 보다는 압도적이었다."라고 대답했다.
비주얼과 음악은 물론이고, 접근방식도, 호흡도, 압도적이었고, 또한 새로운 경험이었다.
사실 설정을 하나하나를 뜯어보다 보면 이것이 결코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듄> 세계관에서 가장 중요한 설정이자, 가치(값어치) 있고, 그 쓰임새가 다양하며, 문명 발전의 원동력이 되지만, 문명이 발전하자 그 수요가 폭발적으로 커져 공급자가 원산지로부터 착취해야하는 대상이 되어 결국 원산지인 듄, 아라키스를 불행으로 몰아넣은 물질인 멜란지 스파이스는 <블러드 다이아몬드>, 그러니까 산지인 아프리카를 피로 얼룩지게 했던 다이아몬드와 1980년대 말까지 미국의 절대적인 우방이었던 이라크가 전쟁의 땅이 되도록 만든 석유, 도난 당하였다가 결국 와칸다 국왕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비브라늄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여성들이 주축이 되어 인류를 바른 길로 이끌겠다는 목표로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활동하여 정계를 좌지우지하고, 은밀하게 가문간의 교배 계획을 수행하고 자식의 성별을 결정하여 인류를 개량하며, 정신과 육체를 끊임없이 단련하여 다양한 초능력을 가지고 있고 특히 통칭 보이스라는 능력으로 말하는대로 상대방을 조종할 수 있어서, 마녀라고 불리기도 하는 집단 베네 게세리트는 고대 그리스의 신탁 무녀들, 아마조네스, 어벤져스의 위도우들을 연상하게 한다.
결국 <듄>은 인간의 욕망 때문에 착취 당하는 자연과 약자들의 사회, 그리고 당연한 수순처럼 이어지는 파멸, 인류의 자가당착, 욕심 때문에 외로워지고 오갈 곳 없어진 수많은 <나귀가죽>의 라파엘들, 목표 달성을 위해서라면 수단의 비인간적인 측면은 용인하는 태도에 대하여 우리 사회에 강력한 시정조치를 권고하고 있다.
요컨대 영화는 서사의 규모만큼이나 다양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으나 하나 같이 흔한 것들이다.
설정 또한 그렇다.
파벌을 나누어 벌이는 권력 다툼, 절대 권력자의 신흥 세력에 대한 견제, 소중한 존재 때문에 저지르는 실수, 배신, 질투가 낳은 비극, 몰살, 얼핏보면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한 군데로 모아 놓은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롭다. 새롭다고 느낀다. 그것도 압도적으로.
기시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인류 역사 내내 반복 되던 경고와 동서고금에서 끊임 없이 재생산 되던 플롯은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한번도 담겨본 적 없는 그릇에 담겨, 압도적으로 전달된다.
심지어 왕관을 거부하고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기로 한 왕관의 무게를 버거워하지만, 조금씩 자신의 숙명을 받아들이고 성장하여 스스로 운명을 결정짓기에 이르는 폴의 진부할 수 있는 성장드라마도 지금까지의 다른 성장기와는 완전히 다르게 와닿는다.
프랭크 허버트는 기존에 없었던 세계를 촘촘하게, 완벽하게 구상했고, 드니빌뇌브는 그 세계를 완벽하게 영상으로 구현했다.
살면서 읽고 나서 '이런 이야기는 머리털 나고 처음봐'하고 생각했던 작품이 <해리포터>와 <듄>이 영화화되면서 자주 비견되고 있는 <반지의 제왕>인데, 그 세계관에서 꺼내놓고 보면 성장소설, 모험담 쯤으로 줄여 말할 수 있는 이야기가
세계관과 결합하면서 완전히 다르게 독해돼서 상당히 오랜기간 정기적으로 찾아 읽었던 기억이 난다.
(안타깝게도 두 작품 모두 영화는 보지 못했다. 어렸을때는 영상보다 텍스트가 더 낫다고 생각했고 상당시간 텍스트만을 고집했었다.)
<듄>은 <해리포터>, <반지의 제왕>처럼 완전히 새로운 세계의 이야기다.
같은 이야기도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통해 전달하면 다른 밀도로, 다른 느낌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을 증명하는 이야기다.
새로움도 그렇지만 또 짚어야할 지점이 생전 처음 보지만 동시에 그럴듯한, 그럴법한, 아니 진짜 같은 이야기라는 점이다.
프랭크 허버트가 원작을 위해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고, 기존의 우주를 기반으로 새로운 우주를 만들기 위해 새로운 존재들을 만들고 정리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존재끼리의 관계를 세밀하게 정립해 놓았고, 드니 빌뇌브가 이를 설득력 있는, 현실적인 비주얼로, 세밀하게 세계관을 따라가며 아이맥스 화면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설정 하나하나 이유있는 구체화를 시켰기 때문에 과학적으로 가능할리 없는 이야기가 판타지라는 인식 없이 진짜 있는 이야기처럼 다가오는 것이다.
작품전체가 cg처럼 보이는데 막상 티모시가 그린스크린에서 찍은 씬이 거의 없다고 알려져 있으니 현장감과 현실성이 높을 수 밖에 없다.
게다가 파트원에서는 방대한 원작의 이야기의 극히 일부만을 다루고 있음에도 파트원만으로도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로 인식될 정도의 서사구조를 자랑한다.
결과적으로 독자와 관객들은 논리적으로, 과학적으로, 이치적으로 현실성, 사실성이 있는지 따지고 의심하기 보다 어떤 이유가 있겠지 하고 이해하게 되고, 이해는 몰입감으로 몰입감은 다음 장면에 대한 이해로 순환되게 된다.
예컨대 인간이 우주로 진출, 우주제국을 이루어 살고 행성간의 길이를 단축시켜 비행하는 것이 가능할 정도로 과학문명이 고도로 발달했음에도 작품속 인류는 아직 중세 유럽의 봉건제도와 춘추전국시대를 떠오르게 하는 정치, 사회의 구조와 역시 중세 유럽을 보는듯한 의식주 등 생활양식, 칼로 맞서 싸우는 전투방식을 채택하여 살아가고 있다. 심지어 의미 없는 전시행정과 형식적인 의전과 같은 구습마저도 아직 남아있다. 그러나 당연하다는듯이 작동하는 매커니즘과 생활감에 가까운 현실성에 압도당한 관객은 고도로 발달한 AI가 통제력을 벗어나 전 인류에 대한 위협요소로 발전하여 결국 인류가 AI를 배제하는 데에 이르렀다는 원작의 설정을 모르더라도 동서양의 고대에서 현대까지의 다양한 생활 양식이 융합적으로 나타나는 것에 대하여 그 이유는 모르겠으나 이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것이다.
베네 게세리트의 초능력, 폴의 예지력 등 하나 같이 상상력에 기반하여 창조된 허구가 역사처럼, 다큐멘터리처럼 다가온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테넷>에서 출연자들마저도 완벽히 이해하지 못하는 세계관에 대하여 그의 페르소나를 통해 "이해하지 말고 직관으로 느껴라."라고 말했고, 그것이 작품과 관객의 소통에 유효하게 작동했던 것과 비슷하다.
다른점이 있다면 <듄>은 오로지 몰입감만으로 감독의 메가폰적 요소 없이 이를 이뤄냈으니 강력한 상상력과 상상력을 뒷받침하는 탄탄한 서사의 힘이 새삼 막강하게 다가온다.
게다가 서기 10191년, 우주를 배경으로 중세가 떠오르는 삶이라니 어찌나 새로운 모습이던지.
압도적인 작품을 보면서 중요 설정에 오류가 있을 것이라고 의심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아이맥스 관람 최적화를 목표로 만들어졌고 이 점을 최대한 영화적으로 활용하였으며, 늘 놀란 감독과 작업하던 한스 짐머 감독이 <테넷>을 포기하고 작업하여 사운드 또한 몰입을 위해 아예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하여 만들어냈기 때문에 관객은 환경에 적응하고, 세계관에 몰입하느라 긴 러닝타임 동안 다른 생각을 품기 어렵다.
아쉬운 점을 굳이 꼽자면 선과 악이 분명하게 나눠지는 점 까지는 좋은데, 하코넨 가문이 악행을 저지르는 데에 내세우는 명분이 지나치게 미약하다는 점이다.
완벽히 정치적인 상황에서 대가문끼리의 전쟁이 발발하기까지 정상적인 절차나 속이 텅 비어 있을지라도 최소한의 대의명분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쉬움일 뿐이고 서사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니 흠이라고 부르기는 어렵겠다.
메시지 측면에서도 관심 있게 봐야하는 부분이 있다. 스페이스 오페라라는 장르적 특성상 비주얼과 사운드가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긴 하지만 작품내 텍스트의 비중이 결코 낮지는 않다.
주목할만한 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듄>이 그간 인류가 수도 없이 반성해오고 여러 텍스트를 통해 스스로 경고해온
반복되는 실수와 욕망이 낳는 결과에 대하여 고찰하는 한편, 그 문제의 해결책으로 연대를 암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폴이 우주제국의 메시아이자 예언자, 그러니까 히어로라고 생각하면 히어로물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점이 전달된 셈이다.
스파이더맨이나 닥터스트레인지 같은 전형적(캐릭터만 봤을 때) 히어로 영화들을 생각해보면 히어로는 자아와 정체성 때문에 혼란을 겪다가,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고 정체성을 정립하여 가치관과 목표를 정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정도를 걷게 되어 결국 자기자신을 구원하고, 나아가 타인까지 구원하는 히어로로 활약하게 되는데, 히어로의 주변 인물들은 강력한 조력자의 역할을 할 뿐이지 연대를 통해 히어로를 완성하는 역할을 수행하지는 않는다.
말하자면 결국 히어로가 내부 문제를 해결하는데 자기 자신과의 고독한 싸움 끝에 승리하는 것만이 완성형 히어로의 선결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폴 역시 각성 자체는 혼자서 해내었지만 우주적 관점에서 봤을때 폴의 각성이 히어로의 탄생과 동의어가 될만큼 강력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본인이 완성형 히어로가 되기 위해 프레멘과의 연대를 선택하며, 프레멘과의 연대는 그가 듄의 메시아로 성장하는 것을 완성시키는 필요조건이 된다.
프레멘, 사막의 힘이 없으면 폴은 결코 예언을 실현시킬 수 없는 것이다.
아스가르드가 없으면 힘을 쓰지 못하는, 아스가르드가 힘이 원천이기에 아스가르드와 운명을 공유하는 토르의 경우를 빼고는 타인과의 연대가 힘의 완성에 필수적인 조건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기에 이 또한 새롭고, 감동적이다.
토르와 아스가르드 백성이 한 공동체 소속인 반면 프레멘과 아트레이드는 모행성 자체가 다른 집단이라는 점에서 프레멘의 토속 신앙, 종교적 영향과는 별개로 이 연대가 뜻깊게 다가온다.
사막에서 너무 외로워 때때로 뒤로 걷는 그. 그의 손을 잡아주는 이가 있었다면 그는 조금 더 자주 앞으로 걸었을지도 모른다.
메시지, 연출력, 비주얼, 사운드, 몰입감 외에도 화려한 출연진 라인업을 짚지 않을 수가 없다.
극강의 미모를 자랑하는 티모시 샬라메,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비주얼적으로 충격적이었던 영화 <라이프>에서 호연한 레베카 퍼거슨,
<듄>과 같은 스페이스 오페라, 스타워즈에서 파일럿으로 활동한 오스카 아이삭,
(아들을 붙잡고 그가 "나는 파일럿이 되고 싶었단다" 할때 으아니! 했다ㅋㅋㅋ)
한번 타노스는 영원한 타노스, 조슈 브롤린,
(그는 왜 손가락을 튕기지 않는가)
금방이라도 물을 가로 지를 것 같은 아쿠아맨, 제이슨 모모아,
얼굴만으로도 살벌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하비에르 바르뎀,
스파이더맨 브랜드의 뉴 히로인이자 톰홀랜드와 실제 연인인 젠데이야,
가오갤의 드랙스, 데이브 바티스타,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에서 폴카닷맨으로 호연한 데이빗 다스트말치안,
그 외에도 유명한데 나만 잘 모르는 것 같은 스텔란 스카스카드, 장첸, 샬롯 램플링, 스티븐 헨더슨까지 짱짱한 필모를 소유한 능력자들이 호연한다.
특히 티모시 샬라메는 특유의 퇴폐미와 무기력한 듯한 인상이 묻어나는 초반에 비하여 후반으로 갈수록 강력히 각성하는 과정이 뚜렷하게 보여 인상 깊었다.
햄릿을 떠올리게 하는 창백한 인상이 캐릭터에 착붙이었고 근대 서양에서 볼법한 의상을 완벽히 소화해서 놀라웠다.
개인적으로 소년미가 묻어나는 실루엣은 활용반경이 아쉽다보니 크게 좋아했던 배우는 아니었고 (내가 뭐라고), 인상 깊게 보았던 <작은 아씨들>에서 거의 와닿지 않아서 관심이 없다시피 했는데 이번 작품으로 완전히 인상이 바뀌었다.
<테넷>에서 로버트 패틴슨에 대한 인상이 바뀌었을 때는 기쁘고 새로웠는데 이번에는 충격에 가까웠던 것 같다.
아무튼 할말은 많은데 1차 관람으로 끝날 것 같지 않으니 쓰고 싶은 이야기가 생기면 더 쓰고 n차 때도 또한 후기를 써야겠다.
잠이 오지 않아 일기를 쓰고 몇 자 적는다는 것이 꼬박 30분 넘게, 거의 40분 가까이 걸렸고 벌써 시간이 새벽 2시가 다 되어간다.
이야기를 짓는다는 것. 우주를 만든다는 것. 그 위대한 일을 해낸 <듄>의 모든 관계자들에게 전해지지 못할 존경과 감사함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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