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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었다

[다섯개의 오렌지 씨앗 - 아서 코난 도일] 세상에 완벽한 존재는 없다.

by 헌책방 2021. 11. 6.

[다섯개의 오렌지 씨앗 - 아서 코난 도일] 세상에 완벽한 존재는 없다.
세상에 완벽한 존재는 없다.
인간의 계획이란 아무리 완벽하게 짜더라도 실행에 옮기면 빈틈이 생기기 마련이다.
다가오면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것. 동공이 커지는 것.
바이올린을 켜는 고지능 소시오패스가 누군가를 구하러 가는 것.
한 발 앞선 누군가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
의뢰인을 잃고 내 자부심에 상처를 입었다고 고백하는 것.
완벽해 보이는 이성에도 균열은 생긴다.
산산조각 나서 불타는 종이의 집.
완벽하지 않아서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존재.

 

나는 책을 엄청 아껴보는 편이다. 작품을 알리고 싶은 마음에 친구들에게 빌려주는 것을 즐기면서도 혹시 책이 상해서 돌아올까봐 걱정한다. 그러니까 책을 정신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아낀다고 해야할까. 그토록 아끼는 여러 책 중에 1번을 고르라면 <셜로키언을 위한 주석 달린 셜록홈즈>를 꼽겠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셜로키언인 클링거가 편집하고 방대한 양의 주석을 달아 만든 이 책은 천 개가 넘는 주석이 달려 있고, 페이지 수도 천페이지를 초과하여 독자들이 얼마나 셜록홈즈에 집요하게 파고들고 잊지 못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되었다.
워낙 무거운 책이라 본가에 보관하고 있고, 그래서 자주 펴보지는 못했지만 아빠가 가끔 집 정리한다고 내 보물 같은 책들을 버렸다는 소식을 들으면 당장 이 책의 생사 여부 먼저 확인할 정도로 아끼고 있다. 참 <반지의 제왕>과 <해리포터>도 마찬가지.
아무튼 지금은 조금 덜하지만 예전에는 나도 sherlocked 된 채로 살았던 몸이고, 바이올린 켜는 셜록을 보면서 나도 생각할 때 바이올린 연주를 했을 정도로 셜록의 완벽해 보이는 이성과 강력한 자기 통제를 동경했었기 때문에 셜록 홈즈라면, 아서 코난 도일의 작품이라면 잊고 있던 열광과 흥분이 되살아 나고는 한다.
패키지와 구성, 덕션의 탁월한 능력에 감탄하며 앞선 리뷰들에서 극찬했던 열린책들 35주년 기념 세계문학 중단편 세트(noon)에 아서 코난 도일의 <보헤미아 스캔들>, <빨강 머리 연맹>, <다섯 개의 오렌지 씨앗>이 포함되어 있어서 실로 오랜만에 셜록을 텍스트로 읽었다.
조금 다른 이야기부터 하자면 영국 BBC one에서 제작하여 수많은 셜록홈즈 팬들을 양산하고, 기존 팬들의 팬심에 불을 지폈으며, 베네딕트 컴버배치에게 현재의 위상을 만들어준 드라마 <셜록>은 현대 영국을 배경으로 뼈대와 핵심 설정은 원작에 충실하되 독창적이고 기발한 방식으로 원작을 브라운관에 옮겼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에피소드 시즌 2의 <벨그라비아 스캔들>과 크리스마스 특별편 <유령신부>가 각각 <보헤미아 스캔들>과 <다섯 개의 오렌지 씨앗>을 재해석한 에피소드들이다. <벨그라비아 스캔들>은 아이린 애들러의 활약 비중을 높여 셜록이 평소에는 보이지 않는 타인에 대한 존중, 예컨대 셜록이 아이린 애들러를 The Woman이라고 부른다던지 하는 원작의 설정에 설득력을 더했고, 원작 세계관에는 한 번 등장하여 셜로키언들의 상상력을 자극해온 이 여성 캐릭터의 영향력을 성공적으로 강화시켰으며, <유령신부>는 KKK와 연관된 다섯 개의 오렌지 씨앗의 의미는 그대로 가져오되 여성 참정권 운동을 접목 시켜 여성 인권 및 소수자 인권에 상당한 비중으로 초점을 맞춰 원작을 재해석 해냈다. 드라마와 원작을 매칭해서 읽는 방식은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드라마 시즌1 핑크색 연구를 본 후 주홍색 연구를 읽는다던지, 원작부터 읽고 드라마를 감상한다던지 하는 방식으로 드라마와 원작을 함께 즐기면 훨씬 즐거운 감상이 될 것 같다. 겨울이 깊어 외출하기가 어려워지면 집에서 이 작업에 혼자 몰두해 볼 생각이다.
<보헤미아 스캔들>은 장편에만 등장하던 홈즈가 첫번째로 등장하는 단편이자 양이 신통치 않은 홈즈의 미제 사건 캐비넷에 포함 되는 에피소드다. <빨강머리 연맹>은 셜록 홈즈 시리즈가 단편으로도 완결성이 높다는 사실을 평가를 받으며, 기묘한 사연, 기가막힐 정도로 정확한 추리, 극적인 해결까지 세계에서 가장 완벽한 추리소설로 꼽히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연상하게 하는 완벽한 구조가 돋보인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보다 거의 40년 정도 먼저 발표된 작품) <다섯 개의 오렌지씨앗> 역시 기묘한 사연, 정확한 추리가 돋보이지만 몇 안되는 미제 사건에 포함 되는 에피소드다. 독자들이 추리소설을 즐기는 이유는 특유의 긴장감과 해결을 통한 성취감의 대리만족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미제사건인 <보헤미아 스캔들>과 <다섯 개의 오렌지 씨앗>이 셜록홈즈 단편을 대표하는 작품들이 되었다는 사실이 의미 있다. 해결 되지 않은 채로, 장기 미제로 남더라도 셜록과 왓슨의 탁월하고 정확한 추리와 자책, 후회 같은 감정은 잘 드러내지 않는 셜록의 인간적인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는 면에서 두 작품이 외전으로 취급 받지 않고 다른 작품들처럼 사랑 받게 된 것이다. 추리소설에 적합한, 완벽한 서사구조의 덕도 크지만 캐릭터의 승리라고 볼 수 있겠다.
일반적인 고전이 독자에게 선사하는, 메타포가 의미하는 바를 나름대로 해석하고 상상하면서 느끼는 독해의 기쁨은 상대적으로 적지만, 행간에 적혀 있지 않은, 책장 너머에 있는 일을 추론하면서 상상력이 자극 받고, 추리의 과정에서 사회의 어두운 부분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발견하고, 저마다 의미 있는 알갱이를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셜록 홈즈>와 오늘도 셜로키언들이 달고 있는 수많은 주석들은 단순 추리소설과 캐릭터 분석의 부산물이 아니라, 문학사에 매우 가치 있는 유산이다.

뛰어난 색감까지 자랑해버리는 열린책들 35주년 기념 noon 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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