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맥베스> - 전주시립극단 명작극장 / <맥베스> - 셰익스피어] 욕망하느냐 욕망 당하느냐 그것이 문제다.
비극의 서막은 아주 작은 설정이 올린다.
비극적인 일을 겪으며 그 원인을 되짚는 사람들을 지켜 보면,
"아 찾았다! 그 일 때문이었어!" 가 아니라
"어디서부터 잘못된거지?" 가 더 흔하게 들리는 이유다.
시작하면 멈추거나 되돌릴 수 없는 것.
파멸을 되감을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파멸이 아니다.
셰익스피어는 영미 문화의 시원을 빚었다. 그 영향력은 400년 가까운 세월동안 살아남았고, 현대문화의 클리셰에서 아직도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예컨대 '황야', '마녀', '황야의 마녀'의 이미지나 비극적인 현실을 밤, 비극의 극복을 아침으로 비유한 그 유명한 스칼렛 오하라의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원형은 밤이 지나면 아침이 오기 마련이다)" 와 같은 라인은 <맥베스>에서, 뿌쉬낀의 <벨낀 이야기>를 비롯한 수많은 작품에서 확대 재생산 된 원수 지간인 가문의 자제들이 사랑에 빠지는 설정, 금지된 사랑은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극한의 상황에 몰린 채 복수에 대한 열망에 시달리지만 딜레마 앞에서 시행에 나서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올드보이>의 오대수,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의 휴 글래스와 같은 캐릭터는 <햄릿>에서 그 원형을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셰익스피어는 상당히 그리스로마신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황야의 세 마녀는 눈알과 이를 돌려가며 사용하는 그리스로마신화의 세 마녀 그라이아이를, 레이디맥베스는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와 연적에게 잔혹한 복수를 일삼는 제우스의 부인 헤라를 연상하게 하는 등 그리스로마신화의 세부적 설정과 인물의 모습을 작품에 차용한 경우도 있다. 셰익스피어를 포함한, 현대까지 영향력을 끼치는 작품을 써낸 위대한 작가들도 그리스로마신화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기 때문에 정밀하게는 그리스로마신화가 원형이라고 봐야하겠다.
아무튼, 르네상스와 셰익스피어가 대표하는 대세문화와 그에 편승하여 대중의 다양한 시각을 저해하는 문화 아이콘에 대한 경계 측면에서 셰익스피어와 그의 문학에 대한 재평가도 활발하지만 (ex. 연극 <썸띵 로튼>, 글 말미에 감상문 첨부), 아직까지는 미학의 기준을 정립하고, 인간의 본질에 대한 고찰을 간결, 명료하게, 접근성 높고 유연한 방식으로 독해가능하도록 희곡으로 표현해냈다는 점에서 그의 업적은 존중 받아야 마땅한 것이다. 특히 <맥베스>는 <오셀로>, <햄릿>, <리어왕>과 함께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에 하나면서 비극을 가장 강렬하게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맥베스와 레이디 맥베스는 욕망으로 인해 죄악을 저지르고, 죄악에서 벗어나고자 하지만 이미 시작된 파멸에서 탈출하지 못한다. 이룩한 욕망을 지키기 위해 또 더 큰 욕망을 품게 돼서 그들은 그야말로 부지불식간에 다른 죄악을 범하고 만다. 마음에 꿈틀대던 작은 욕망에 귀기울이던 맥베스 내외는 피로 얻은 것을 피로 지키고, 지키지 못한 것은 피로 갚아야하는 잔혹한 운명에 깔리게 된다. 주목할만한 것은 초반부터 잔혹하다고 느껴지는 레이디 맥베스에 비해 맥베스는 인간적이고 선한 면모가 두드러지며 욕망에 쉽게 굴복 되지 않고 계획 결행의 마지막 순간까지 크게 갈등하고 괴로워한다는 점이다.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은 죄악을 저지르는 것을 보고도 대중이 맥베스를 안쓰럽게 생각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욕망 때문에 해서는 안되는 일을 저질렀지만 원래 맥베스는 선한 사람이었고, 죄악을 저지르는 사이사이에도 엄청난 죄책감에 시달리고 후회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가 저지른 일들에 대하여 책임을 다했다고 평가 받거나 용서 받을 수는 없으나 독자는 선한 자가 욕망에 집어 삼켜져 파멸을 자초하는 과정, 욕망에 부딪혀 영혼이 산산조각 나 표류하는 중에도 한번에 완전히 악인이 되지 않고 내적 갈등을 계속하는 모습을 보며 욕망이 영혼에 끼치는 영향과 인간은 선하면서도 악하다는 인간 본성 특질에 대하여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다.
또한 주목할만한 점은 텍스트 해석의 오남용과 관련이 있다. 신탁, 예언이 무서운 이유는 그 내용 때문인 경우도 있지만, 이를 해석하는 제사장이 자신의 의도대로 이를 이용하기 위해 텍스트를 부러 잘못 해석하고 유포하여 대중으로 하여금 불안, 공포로 인해 판단력이 흐려져 잘못된 행동을 하도록 유도하고, 비극적 내용의 예언이나 신탁은 이루어지도록, 긍정적 내용의 예언이나 신탁은 이루어지지 않도록 결과값을 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맥베스는 자신이 왕이 될 것이라는 마녀들의 예언의 결과에 방점을 두고, 욕망에 눈이 먼 나머지 왕을 죽인다는 행위의 정당성이 왕위의 정당성, 안정성에 영향을 끼치게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전혀 계산하지 못하고 행동에 나선다. 그러나 마녀들은 예언의 결과에 대하여 짧게 이야기했을 뿐 맥베스가 보위에 오르게 되는 방법에 대하여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맥베스도 물어보지 않으므로, 결과적으로 맥베스는 황야의 마녀들의 예언을 오남용하여 예언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어떤 과정이 수반되어도 상관 없다고 생각한 셈이 된다. 이는 현재 넷플릭스 화제작인 <지옥> (2021.11.23 - [영화봤다] -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지옥 ] (후기 1) 어쩌면 여기가) 과도 엮어 생각해볼만한 문제로, 정보선점자가 현상을 자신의 입장에 유리하게끔 해석하고 명명하여 미디어를 통해 유포하여 결국 사회 전체에 악영향을 미치는, 흡사 지옥이나 그리스로마신화, <맥베스> 속 비극 같은 현재에도 유효한 문제점이다. 전주시립극단에서 무료공연으로 상연한 연극 <맥베스> 는 원전을 그대로 따르되, 연극 마지막 씬에 세 마녀가 현대에도 살아있다는 설정을 삽입하여 맥베스의 텍스트에 대한 오해, 그로 인한 비극이 '어쩌면' 마녀들이 의도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상상을 하게 한다. 이 점에서 텍스트 해석의 오남용, '공언'의 위험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서 좋았다. 말은 힘이 세서 공공연하게 언급되는 순간 힘을 갖기 마련이다. 검은 옷을 입고 머리를 잔뜩 부풀리고 황야를 떠돌던 마녀들이 현대에서는 타인의 욕망을 건드려 비극을 유도하고 그 욕망과 비극을 먹고 윤택해져 루이비통을 들고, 화려한 화장을 하고,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이제는 황야가 아니라 펜트하우스에서 만난다는 상상 자체도 매우 재미있었다. 맥베스의 비극이 비단 작품 속의 이야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도 벌어지는 이야기인 것을 환기하는 장면이어서 의미가 깊었다.
무료공연이었던지라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맥베스가 죄책감과 후회에 몸부림 치면서도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해 겪는 고통스럽고 복합적인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져서 좋았고, 괴로움 때문에 맥베스 눈에만 보이는 '환영', '유령'이 조명으로 처리되는 점도 새롭고 좋았다. 빨간 불빛을 교차시켜 칼자루를, 파란 불빛으로 의자를 비춰 밴쿠오의 유령을 표현한 부분은 정말 인상 깊었어서 다시 보고 싶다. 셰익스피어표 비극의 미학의 핵심은 뚜렷한 기승전결과, 고조되는 갈등이 해소되면 밤이 지나면 아침이 오듯이 평화가 깃들게 된다는 점인데 연극에서 이 부분을 뚜렷하게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조명도 새로웠지만 역할에 있어 새로웠던 점은 맥베스 역을 율브리너를 떠올리게 하는 큰 체격에 민머리, 왼쪽 귀에 금색 귀걸이를 찬 배우분이 연기했다는 점이다. 맥베스가 머머리라니 어느 누가 작품을 읽으면서 그런 상상을 해보았을까. 대부분은 <튜더스>나 <킹덤 오브 헤븐> 속의 인물을 상상했을 것이다. 나도 맥베스의 이미지에 대한 편견이 있었기 때문에 초반엔 엑? 하고 소리가 나와서 입을 틀어막을 정도로 굉장히 충격적이었는데, 익숙해지고 나니 맥베스가 영주이자 장군이었던 시절은 용맹함을, 보위에 오르고 괴로움 때문에 맘이 나약해지고 몸은 노쇠해졌을 때는 무방비 상태로 비극에 놓인 맥베스의 상황을 시각적으로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아쉬웠던 점은 레이디 맥베스 역을 맡은 배우분께서 (이유가 있겠지만, 나보다 전문가시지만) 라인을 자꾸 떨리는 목소리로 처리했던 점, 배우분들이 총 4차례 라인을 버벅이거나 문장 끝을 씹어 처리하셨던 것, 연출이었는지 아닌지 헷갈리는데 극초반에 마녀들이 그 유명한 "좋은 것은 나쁜 것, 나쁜 것은 좋은 것"을 포함한 연기를 할 때 마이크 소리가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점이었다. 연출이라면 마녀들의 대사는 또렷하게 들릴 수 있도록 수정이 필요할 듯 하다.
파멸은 되감을 수 있다면 더 이상 파멸이 아니다. 욕망은 스스로 자라 더 큰 욕망을 끌어당기고, 피는 피를 부르며, 비극은 더 큰 비극으로 치닫는다. 욕망은 피를 먹고 비극을 낳으며 스스로 파멸의 영양분을 자처한다. 그리고 선과 악, 그리고 그 사이에 무수한 다른 모습들을 지닌 복잡한 구조물, 인간은 욕망 앞에서 허약하고 위험한 존재다. 버티느냐 버티지 못하고 삼켜지느냐 그것이 문제다. 맥베스는 욕망 앞에 버티지 못한 자의 상징이다. <맥베스>는 연극으로 처음 보는데 적당한 속도의 호흡으로 그리고 새로운 방법으로 작품을 음미하고 정리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전주에서 지내면서 감사하게도 저렴한 가격에 시향 공연을 관람하거나 무료로 좋은 연극을 볼 수 있어서, 전주를 문화의 고장으로 만들고 시민들이 다양한 문화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하는 많은 관계자분들께 정말 감사하다고 말씀 드리고 싶다.
그리고 처음으로 덕진 예술 회관에 방문해서 엄청나게 헤매는 관람객에게 친절하게 정문 위치를 알려주신 맥더프 역의 배우님께 정말 감사하다. 시트콤 인생은 선생님 덕분에 안 늦고 제 시간에 세이프해서 맨 앞줄에 앉아 잘 감상했습니다!
아무래도 연극을 보기 전에 복습을 해야겠다 싶어서 더스토리 출판사에서 출판한 <양장에디션 초판본 맥베스 : 1673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을 구매해서 봤는데 오타가 있어서ㅋㅋㅋㅋㅋㅋ 출판사에 전화드려 수정하시라고 말씀드렸다 :) 뿌듯
붙임 1. 글을 쓰다가 썸띵 로튼 이야기가 나와서 예전에 이 뮤지컬을 보고 쓴 후기를 첨부합니다'ㅁ'
👏👏👏
2019. 6. 12. <Something Rotten>
내 무메는 영화를 볼지 말지를 결정하는데에 있어 굉장히 신중한 편인데 그 결정에 큰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Rotten Tomatoes> 지수다.
이 저명한 영화 정보를 제공하는 웹사이트의 이름인 로튼 토마토는 다름이 아니라 연기를 못하는 연극 배우에게 관객들이 토마토를 던지는 행위에서 유래한다. 로튼토마토 지수가 높을수록 평가 대상인 영화의 평가가 높아지는건 브랜드 네임이 로튼 토마토가 된 유래에 견주어 봤을때 상당히 아이러니하다.
토마토를 많이 맞을수록 영화는 찬사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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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추측이고 짐작이지만 못하는 연기와 신선한 연기는 온전히 평가자의 주관에 의지하여 결정 지어지기 때문에,
무엇인가에 대한 평가는 상대적이기 때문에, 이런 네이밍이 가능해진게 아닐까.
<Something Rotten>에 대한 감상은 이런 추측(내지는 상상)과 궤를 같이 한다. 극은 썩어가는 (혹은 이미 썩은)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선과 악의 대비, 구세력과 신세력의 대립, 계층간의 갈등도 분명하지 않다.
관객이 현실세계에서 어떤 입장인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가 Something이 무엇인지, Something이 얼마나 썩었는지를 결정하고 의미를 부여한다.
브로드웨이에서 이 뮤지컬의 블랙 코미디가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은 극이 갖는 이러한 태도 때문이 아닐까.
Something을 무대를 바라 보는 내가 결정하고 따라서 씁쓸하게 웃기도하고 박장대소하기도 하고
극이 끝나면 한참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해보는 재미에 푹 빠질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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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드웨이 42번가, 캣츠, 시카고, 베니스의 상인, 라이온킹 등 다양한 뮤지컬의 패러디 등 볼거리가 다양했던 것은 물론이고 내재한 의미를 잃고 그저 화려함에 몰두하고 급기야는 스스로 그 한계에 파묻혀 버리는 쇼비즈니스의 현실에 대한 비판과 그럼에도 아직까지 그 시류에 희미해지지 않은 작품들에 대한 존중, 극 중 르네상스와 셰익스피어가 대표하는 대세문화와 그에 편승하여 대중의 다양한 시각을 흐리는 문화 아이콘에 대한 경계, 극 중 청교도가 대표하는 소위 선구자에 대한 비틀기, 이 비판을 딛고 Someone이 나가야할 방향성에 대한 시각까지. ㅤ
많은 생각이 드는 좋은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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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밤이 지나고
하늘을 푸른빛이 채우고
온통 초록빛이던 풀밭 위에
나무에서 여름내 살이 오르고 속이 꽉찬,
무언가가 똑 떨어졌다
이 나뭇가지 사이에서 썩어질 나를 세상에 내놓았다
나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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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mething Rot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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