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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었다

[인간실격 - 다자이 오사무] 스노우볼에 보내는 편지

by 헌책방 2021. 1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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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실격 - 다자이 오사무] 스노우볼에 보내는 편지
평범하다. 보편적이다. 겉보기에 평화로운 이 판단의 기준만큼 폭력적인 것도 없다.
서로 다르게 태어났고, 그래서 모였을 때 알록달록 아름다운 우리는.
회색 빛깔 구획에 들어가기 위하여 아등바등. 애를 쓴다.
과반수가 찬성한적도 없고, 저마다 다르게 설정한, 통일된 적 없고 구체적으로 정해진 바 없는, 실체 없는 기준에 닿기 위해서 또는 벗어나지 않기 위해서,
평범하다는 판단이 내려질 날카로운 기준점 위에 까치발로 위태롭게 서서 끝도 보이지 않는 고독한 싸움을 한다.
바람 불면 흩어질, 비가 내리면 무너질, 눈이 오면 눈과 함께 사르르 대지 위에 녹을 연약한 꼭지점.
그 바늘 끝이 조용히 그러나 갈갈이 자신을 하얗게 찢어버릴지도 모르고, 잘 차려입고 마음을 다잡고 흔들리는 스노우볼 안에 발끝으로 선 발레리나.
유리 바깥은 진짜 바람이 불고, 진짜 비가 내리고, 진짜 눈이 내리지만, 더 넓은 곳에서 춤출 수 있다. 그래서 그 춤이 더 애처롭다.

     
다자이 오사무는 1948년 3월 <인간실격> 집필을 시작하여 5월에 탈고한 후, 6월에 애인과 함께 자살한다. 그 후 이 작품은 작가의 유언장이라는 가십과 자극적인 선입관에 힘입어 현재까지 약 1천만부가 판매되며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짧은(약 140쪽) 분량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작품은 누구도 명확하게 표현하지 못하지만 일반적이라는 기준범위 안에 들지 못한 '보통' 사람들이 겪는 고통,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하지 않거나 못하면서 생기는 갈등, 그리고 이 갈등이 모든 파국의 근본적 원인이라는 고찰, 전쟁으로 인하여 무고한 자들이 입는 피해의 잔상, 아동학대, 성추행, 성폭행으로 인하여 아동이 입는 일생일대의 막심한 피해, 사회에 만연한 가스라이팅, 가부장적 사회의 문제점, 한번의 잘못된 선택이 존재의 삶 전체를 바꿔버리고 되돌릴 수 없을만큼 엄격하게 유지되고 있는 경직적인 사회 구조 등 당대 일본 사회 뿐만 아니라 후대 모든 사회에서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다른 존재를 존중하지 않으면 생길 수 밖에 없는 여러 사회 문제에 대하여 정확하게 지적하고 고찰하고 있다. 특히 문제점에 대한 고찰의 범위가 넓을 뿐 아니라 짧은 표현만으로도 독자가 이를 느끼고 함께 고민할 수 있을만큼 적확하게 녹여낼 정도로 사고의 깊이도 깊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어렸을 때부터 스스로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눈치챈 주인공은 그 사실을 부끄럽게 여기고 생존에 불필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집안에서 부리던 하인, 하녀들에게 몹쓸짓을 당하게 되고(작품에서는 몹쓸짓으로 표현되지만 성추행 내지는 성폭행으로 추정 된다.), 이로 인해 평범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더 의식하게 되어 이를 감추기 위해 부러 우스꽝스러운 행동만 골라하게 된다. 결국 그는 광대짓에 삶이 눌려 개성을 잃어버리고, 자신이 누군지도 잊게 되며, 주체적으로 삶을 살아내기 보다 타인에게 의존하고 결정지어지면서, 그렇다고 끝내 평범해지지도 못한다. 그는 스스로 인간이 될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스스로 목숨을 끊지도 못하고 산채로 삶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다자이 오사무는 이 비극적 수기 속에 남들이 정한 기준에 자신을 끼워 맞추려는 시도는 남들과 같아지려는 개인의 본능적 욕구긴 하지만 필연적으로 자신을 망가뜨리는 결과를 낳고, 오히려 개성을 중시하며 고유한 길을 개척하는 사람이 타인이 생각하는 보통의 삶,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내고 자아와의 합일에 가까워진다는 측면에서 성공적인 삶에 가까워지게 된다는 지독한 패러독스를 심어놓았다. 그리고 각기 다른 특성을 지닌 개인이 개성을 잃고 파멸에 이르도록 부추기는 불특정 다수의 모종의 폭력, 존재가 서로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평범하다' 혹은 '그렇지 않다'로 분류하려고 하는 편협함과 분류에 쓰이는 기준 자체가 갖는 폭력성을 향하여, 누구도 자신의 의미를 찾고 자아와 하나가 되기 위해서 목숨 걸고 발버둥 치는 개인의 행동을 평가할 수 없다고 일갈한다.


내가 처음으로 이 작품을 읽었던 것이 갓 스물, 처음으로 상경한지 얼마 안 된 날이었던 것 같다. 대학생이 돼서 만난 친구들은 나와는 다른 세상에서 자란 사람들 같았다. 책을 읽던 나는 내가 요조처럼 갈갈이 찢기는 것 같았다. 나는 작은 마을에서 19년을 살다가 별천지에 떨어진 허공이었다. 겁쟁이는 행복도 두려워하고, 솜방망이에 얻어맞고도 다치며, 행복에 상처 입는 일도 많다. 그 나지막한 고백에 작은 마음이 찢어져버렸다. 그 후로 이 책을 다시는 읽지 않았고, 1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다행히도 나는 갈갈이 찢긴 나를 잘 모아서 나로 살기로 했던 것 같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광대로 살지 않았고, 웃고 싶지 않을 때는 웃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옆에 앉은 사람이 나보다 평범하다고 해서 조급해하거나 나보다 특이하다고 해서 안도하는 폭력적인 인간이 되지 않았다고 자부한다. 그 때 <인간실격>을 읽지 않았더라면 나는 찢어지지 않았을지언정 스노우볼 안에서 까치발로 꼭지점을 딛고 선 광대로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유리 밖 바깥 세상은 여전히 시렵지만, 그럭저럭 견딜만하다. 위태로이 바늘 끝에 서 있는 사람에게 이 글을 추천하고 싶다. 내려와도 괜찮다고 이야기 하고 싶다. 두 발로 땅을 딛고 살자고. 우리는 달라서 아름답다고.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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