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에서 마그리트까지 - 초현실주의 거장들 : 로테르담 보이만스 판뵈닝언 박물관 걸작전] 예술의 숙명
회랑 가득 땀방울이 넘실거렸다. 마스크 안에 묵직한 더위에 숨이 막혔다. 옆에서 그림을 보고 있는 K는 머리부터 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괜찮아?" 내 질문에, 착한 K는 땀을 닦으며 난 정말 괜찮은데? 하는 표정을 보인다. "괜찮아. 너는?" 한다. 나는 안 괜찮았다. 성큼 다가운 여름 앞에서, 때 늦은 두터운 자켓을 입고. 초현실주의가 대체 뭐가 중요하다고 회랑에 서서 더위를 견디고 있는지, 현실감각이 아릿하게 멀어져 가고 있었다.
K는 초현실주의 작가들의 비현실적인 소재와 극히 현실적인 표현방식 앞에서 "우와 이거 진짜 사진 같아!", "우와 저것봐 진짜 그림이 맞아?" 같은 감탄을 쥐어 짜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혼자 전시회에 가고 싶지 않아 친구 K를 괴롭히는 일이 괴롭고 미안해져서 초조했다. 사람이 초조함을 표현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나의 경우에는 안 그래도 말이 많은데 더 여러 말을 늘어 놓는다. "초현실주의는 세계대전 이후 회의주의와 상실감, 부조리주의와 기성 전통의 부조리에 저항하는 정신과 맞닿아 있어. 적극적으로 저항하기 어려울수록 표현방법은 우회하게 되는데, 그게 다다이즘이야. 그리고 이 다다이즘의 영향을 받은 사조가 초현실주의인데, 비현실적인 것을 그러모아 비현실적인 내용으로 표현함으로써 오히려 현실감이 확 와닿는 순간을 유도한거야. 특히 달리는 그 비현실적인 광경을 눈에 보이는 것처럼 현실적인 방법으로 그려냈고, 거기에 편집광적 비판이라고 편집광적인 이름까지 달았대." 그러자 K는 "아. 나는 초현실주의가 진짜진짜 현실적인 것인줄 알았어!" 하고 웃었다. 초현실주의(超現實主義), 현실을 초월(뛰어넘을 超, 넘을 越) 한다는 의미의 surrealism을 K는 superrealism 쯤으로 이해하고 왔던 것이다.
전시회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작품들은 단연 달리의 작품들이었다. <서랍 달린 말로의 비너스>와 같은 조각상은 실물로 처음 봐서 대단히 인상적이었고, <아프리카의 인상>, <태양열 테이블> 등 전형적인 달리의 작품들도 하나하나가 그가 집중했던 환각에 기반한 사유, 편집광적 비판, 시간의 영속성 등의 메시지를 두루 갖추고 있어서 좋았다. 살바도르 달리는 자유와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힘에 대한 저항정신을 대표한다. 그는 자신이 가진 천재적인 재능으로 시대를 대변하고, 사랑을 노래하고, 모든 클리셰로부터의 자유, 모든 억압된 존재가 누려 마땅한 자유, 존재가 본질적인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을 억누르는 사회 구조로부터의 자유, 가장 낮은 곳, 멸시 당하는 곳에 속할지라도 남이 아니라 자신이 정한 기준에 의하여 온전히 자유롭다 느낄 수 있는 초월적 자유를 주장하고, 타인을 위해 그 힘을 나눴던 다정한 이웃이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삶의 여러 요소에서 강박, 억압, 특히 성적으로 강박에 시달렸다. 그는 뛰어넘기 어려운 여성 자체에 대한 두려움, 성관계에 대한 두려움, 성관계와 식인행위가 갖는 연관성 등의 강박을 작품으로 현현하여 마주보았고, 그럼으로써 나아지기도 또 다시 두려움에 빠지기도 했다. 또한 그는 시간의 영속성(지속성)과 꿈의 존재에 대하여 고민하기도 했는데, 시간은 지극히 상대적인 개념이고, 시제 또한 구분을 위해 만들었을 뿐, 얼마든지 늘어지거나 구부러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연장선상에서 꿈과 무의식도 현실이라는 시간과 감각의 연속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에게 꿈은, 무의식이자 또 다른 현실이기도 했다. 그는 이런 강박과 고민을 작품에 풀어 타인과 공유하면서 자기 자신의 사유를 완성할 뿐만 아니라 그의 시선을 통해 환각을 목격하는 관객들도 함께 사유할 수 있도록 했다. 달리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괴짜였고 종종 그것이 대중을 불편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철저하게 경계인이었던 그가, 마찬가지로 정확히 경계 위에 서있는 모든 존재들을 대신해 자신의 재능과 영혼을 작품에 바쳤다는 점 역시 논란의 여지가 없다. 넷플릭스에서 전세계적인 인기를 누리고 박수칠 때 완벽한 해피엔딩을 남기며 떠난 작품 <종이의 집>의 주인공들이 살바도르 달리의 자화상 속 얼굴을 가면으로 만들어 쓰고 등장한 것은 달리가 그들과 그저 같은 스페인 사람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달리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그가 자신이 정한 액자 옆에 서서 멋지지? 달리가 그렸으니까. 하고 말을 거는 것 같다. 그리고 그가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수염을 외로 꼬며, 무상하고, 무위에 가깝고, 현실에서 동떨어진 프레임으로 인간의 실존은 존재 이유나 목적과 관계 없이 존재함 자체만으로 완성된다고 이야기하는 듯 하다. 종이로 지은 집과 같은 그 무상함 앞에서 누군가는 위로 받기도 하고, 누군가는 이상함을 느끼도 하는 것이 예술의 숙명이다. 둘이 나란히 서서, 비슷한 각도로 몸을 기울이고 주의 깊게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침묵을 뚫고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나는 잘 모르겟어. 미안해. 정말 이상해보여." 솔직한 K의 정돈된 사과가 귀여웠다. 그걸 받아들이고 발견할 수 있는 눈이 높은 안목을 갖춘 눈은 아니며, 받아들이지 못하는 대중이 있는 것은 작품이나 작가가 고민할 일이라고 토닥이며, 엉뚱하게도 행복했다. 더 고매한 취향을 지니고 있고 폭넓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고귀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고귀한 성품을 지닌 K가 증명하고 있었다. "덥다. 빨리 나가자." 하니까 "더 봐도 괜찮아. 나도 재미있어. 더 봐!" 하는 대답이 들려온다. 언젠가 혼자 로테르담 보이만스 반 뇌닝겐 미술관에 로테르담에서 머무는 며칠이고 찾아가 감상하면 될 일이었다. 예술의 숙명만큼이나 무상해보이는 것들을 사랑하는 나의 숙명도 완고하다. 우리는 서둘러 나가서 초여름을 방불케 하는 날씨에 맞서며 시원한 냉면을 먹었다.
예술이 가지고 태어나는 잔인한 숙명을 생각하면, 괜히 그 존재가 애잔하다.
나보다 위대한 것을 애잔하게 여기는 것이 우습기도 하지만.
지난 주말의 여파인지, 그러니까 예술이란 창작자의 의도와 관계 없이 해석하는 사람이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메시지가 달리 받아들여질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아직 남아서였는지,
어제 모작가가 끊임 없이 자신의 작품에 개입하고 있는 모습에 대하여 여러 사람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회사 메신저로 하라는 일은 안하고 가끔 딴 소리를 나누는 절친한 동료 K와의 대화는 늘 마음에 든다.
어제의 대화도 맘에 들어 저장해 놓았었는데,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면 재미있을 것 같아서 업로드한다.
서로 다른 각자의 생각(감상)이 저마다 모두 중요하다는 감각은 늘 소중하다.
성호와 댓글로도 이 상황에 대하여 여러 대화를 나눴다.
마침내 현재 이 작품은 작품 자체가 살아있는 유기체라기보다는 작가의 실시간 팟캐스트에 가깝다고 이야기하자 성호도 아쉬움을 토로하며 팟캐스트 뒤에 트위터를 덧붙였다. 생각해보니 이 며칠은 나의 것과는 다른 생각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몸짓들이 유난히 아름답게 느껴지는 시간들이었다.
인스타그램에서 몇분이 물어봐주셨는데, 제가 게으르게도 얼리버드 티켓을 끊어놓고도 계속 전시를 보러 가지 못하는 바람에 전시회 막차를 타서ㅠ.ㅠ 이미 이 전시회는 끝났습니다. 흑흑
예술의 전당에 사람들이 나와서 오페라 버스킹도 구경하고 옹기종기 모여있었는데 오랜만에 가니까 정말 좋았다.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피드백과 질문은 댓글로 or 인스타그램 seol_vely로 부탁드립니다.
발전에 귀하게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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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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