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전시회] 딜레탕트
우리 집 책장 맨 아래 칸에는 나와 동생의 이름이 대문짝만 하게 쓰여있는 A4 파일철들이 있다. 아빠가 사무실에서 거의 강제로, 그리고 가격 면에서는 반쯤 사기를 당해서 디카와 캠코더를 사 온 이후로 아날로그 카메라들은 먼지 구덩이 속으로 밀려났지만, 나와 루나가 초등학생일 때까지만 해도 외출하는 엄마 손에는 늘 묵직한 똑딱이 카메라가 들려 있었다. 엄마는 사진을 인화해서 A4에 풀로 정성껏 깔끔하게 붙인 뒤, 사진마다 사진 속 찰나가 어떤 순간이었는지 정성껏 각주를 달아 놓았다. 나랑 루나는 그 흔적을 열어볼 때마다 흠칫한다. 위에서 내려찍은 우리들의 머리통은 만화 캐릭터처럼 둥글고 거대하다. 그러나 엄마는 그 사진들을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하고 사진 속 순간을 떠올리며 즐거워한다. 엄마가 어디 전문가니. 옷은 이쁘게 입혔지. 근데 사진은 모른단 말이야. 그래도 이쯤이면 정말 잘 찍었지. 그리고 글은 어떻고. 이대로 사진집 내도 된다 얘. 엄마는 항변할 때만은 꼭 새침한 서울말을 쓴다.
딜레탕트(dilettante). 예술이나 학문 등의 분야에 있어 전문가는 아니지만, 해당 분야를 열렬하게 애호하는 사람. 그러니까 딜레탕트는 전문가가 아니면서도, 전문가만큼 진심으로 예술과 학문을 좋아하지만 여전히 비전문가인 사람이다. 예전의 나는 내가 딜레탕트라는 사실이 싫었다. 문학 작품을, 특히 고전문학을 열렬히 사랑하고 탐독하지만 가까이 다가가고 조금씩 이해할 수 있는 범위가 넓어질수록, 글들은 먼발치로 물러났다. 행간에 파고들며 얻은 소중한 것들을 모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긴 일기를 쓰고도, 내 부족함이 부끄러워서 어딘가 내놓지 못했다. 같은 작품을 읽고 다른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무슨 마음을 갖게 되었는지 궁금해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나는 딸의 순간을 갈무리한 사진을 모아 각주를 달아 사진첩을 만들고, 딸에게 물려주려고 그것들을 차곡차곡 모으는, 엄마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엄마가 물려준 사진첩들 덕분인지, 사연이 담길 순간을 포착한 사진들을 좋아한다. 렌즈 너머로 광각으로 펼쳐지는 세상을 바라보며, 셔터를 누르기 전에 마른침을 삼켰을 작가의 심정을, 액자 밖에서 지그시 바라보는 것이 즐겁다. 게다가 액자 속에서 세상에 거의 이미지적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은 얼굴을 발견하면, 그 특별함은 극에 달한다. 그런 의미에서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은 한 장의 사진에서 말로 다 표현 못할 다양한 이야기와 사연을 발견하고, 그에 대해서 생각에 잠기는 것을 즐기는 감상자들에게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실존주의 철학자이자 스스로 글을 씀으로써 존재했고 자신이 존재한 것은 오직 글짓기를 위해서였다고 고백했던 문학의 거장인 장 폴 사르트르의 몇 없는 초상 사진을 남겼다. 사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짧은 한마디로 실존주의 개념을 최초로 정립한 천재이자,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발표되자마자 문학의 제도권 편입과 독립성 위협을 이유로 수상을 거부한 독보적이고 독립적인 지성과 사회운동의 상징이다. 그러나 그는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했고 사시안을 가지고 있어 못생긴 아이로 유명했고, 때문에 또래와 어울리지 못했다. 독학으로 글을 배우고 어른들도 이해하지 못하는 작품들을 술술 읽어냈지만, 학교에서는 받아쓰기도 제대로 하지 못해 부진아 취급을 받았다. 이런 이유로 그는 평생 자신의 얼굴을 똑바로 담는 인물 사진과 초상화에 등장하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브레송은 이런 사르트르를 초상 사진으로 남기는 것에 성공하였고, 그 사진은 결국 초상 사진의 아이콘으로 남았다. 브레송은 초상 사진은 인물에 대한 물음표를 찍어놓고, 사진으로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연을 가지고 있는지를 설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센 강과 센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멀리 보이는 루브르 박물관, 입에 얕게 문 파이프, 파리지앵 다운 시크한 패션, 그가 평생을 콤플렉스로 여겼으나 굳고 깊은 눈빛을 담은 사시안까지. 과연 그가 사르트르를 담은 사진은 사르트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연을 가지고 있었는지, 사진에 찍히던 순간 한쪽 눈은 렌즈를 바라보면서도 다른 한 쪽 눈은 멀리를 바라보며 얼마나 넓은 시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지를 상상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전에서는 논픽션 소설 장르의 창시자인 작가 트루먼 카포티의 초상사진도 확인할 수 있다. 카포티는 불우한 유년 시절,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비롯한 뛰어난 작품들로 얻은 높은 명성, 동성애자로서의 성 정체성을 드러내면서 얻은 냉혹한 비난, 뉴욕 사교계의 queen이었던 과거가 무색한 비참한 말년 등 인생 전체가 그의 작품보다 더 드라마틱 했다. 브레송이 카포티를 담은 사진에서 카포티는 흰색 무지 티셔츠를 입고 있고, 거의 모든 다른 사진에도 그렇게 등장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를 위험할 정도로 아름답다고 표현하며 극찬하는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의 방대한 티셔츠 컬렉션에도 불구하고 사진을 찍을 때만은 늘 흰색 티를 입는 것도 카포티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전시회에는 장 폴 사르트르와 트루먼 카포티의 초상 사진 뿐만 아니라 사진 이면의 사연을 상상하게 하는 작품으로 가득했고, 여전히 딜레탕트인 나는 그 안에서 비전문적인 호사가 (좋아할 호 好, 일 사 事, 집 가 家, 일을 벌리기 좋아하는 사람, 남의 이야기를 떠벌리기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뜻도 있는데 다행하게도 나는 타인의 사생활에 무심한 편이다.) 만이 누릴 수 있는 자유로운 감상의 기쁨을 맘껏 맛볼 수 있었다.
"인생은 매 순간 다르다. 인생의 비극. 세상엔 양극이 있고 한쪽이 없으면 다른 한쪽이 존재할 수 없다.", "내게 가장 중요한 주제는 언제나 인간이었다. 인간, 그리고 짧고 덧없고, 위협받는 우리 인간의 삶." 그러한 사진을 찍는 사람의 필름에 장 폴 사르트르의 초상이 담겼다는 사실이 자못 의미심장하다. 훗날 장 폴 사르트르의 작품마다 그 사진을 본떠 그린 초상이 담기게 될 줄이야. 다리 위에 선 모델과 작가 모두 상상하지 못할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인생은 매 순간 다르다. 브레송의 사진 속에는 거대한 모순인 인생 앞에서 자신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묻는 인간이 있다. 자신이 부족한 존재임을 알고, 세상이 완벽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그렇지 않으면 세계는 깨어진다는 자각이 있다. 우리는 모두 서로 다르고, 그 다름을 상호 존중할 때, 느슨한 연대 안에서 존재의 균형이 이룩 된다는 철학이 있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며, 나약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감으로써 존재한다는 무상한 의지가 살아 숨 쉰다.
다행히 완전해지고 싶다는 오만한 열망이 옅어졌는지, 언제부터인가 완전한 전문가는 없으며, 세상에 완벽한 감상은 있을 수 없고, 정답이 명확한 예술은 없음을 깨달았다. 일기를 조금씩 타인이 읽을 수 있는 채널에 올리기 시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브레송을 만났다. 브레송은 "나는 여전히 아마추어지만, 더 이상 딜레탕트는 아니다."라고 이야기했다. 딜레탕트는 이탈리아어 dilettare (동사 : 즐기다)를 어원으로 한다. 그러니까 나는 자유롭게 즐기는 사람이며, 더 이상 딜레탕트가 아닌 순간 아마추어가 '될 수도 있는' 가능성을 가진 상태에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언젠가 내 부족한 글을 모아 딸에게 내어주며 엄마는 이런 생각을 하고 살았고, 지금 당장 책을 내도 될 정도라고 너스레를 떠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우리 엄마처럼. 다행하게도, 나는 참 엄마를 닮았다. 그리하여 평생 딜레탕트일지라도. 짧고 덧없는 삶일지라도. 오늘을 즐길 것이다. 오늘을 살 것이다.
예술의 전당에서 좋은 시간 보내고 행복했어요 :)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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