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수집가의 초대] [추성부도 - 김홍도] 위로의 수집
밤과 새벽 사이로 난 가느다란 틈 사이에 앉아 일기를 쓰고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으면 사방이 넘실넘실 새살거리는 것이 느껴진다. 인생은 늘 쉽고 즐겁지만은 않다. 삶에 필연적으로 동반했던, 사랑하는 사람들이 떠나고 나면 눈가에 송골송골 맺혀 남는 고독과, 누구도 완전히 공감해주지 못해서 홀로 공기로 남은 고뇌와 한숨은, 대부분의 순간 사방에 꽂힌 책들과 연필과 종이가 맞부딪어 내는 사각사각 소리가 위로해왔다. 웃음으로 들썩이던 눈꺼풀과 갈비뼈에, 부지불식간에 물기와 고민이 맺힐 때면, 밤의 벽들이 어김 없이 앉은 자리 주위로 빼곡히 둘러앉아 위로를 건넨다. 독서는 이상한 행위다. 독서를 통해 새로운 이야기, 정보, 감정을 흡수하고 연산하면서도 마음에 맺히고 머리를 메우고 있던 것들을 책장 사이에 갈무리 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큰 혜택 중에 하나다. 책을 덮고 현실로 돌아오면 문제가 뾰로롱하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나 문제의 무게는 전보다 가벼워지고, 가벼워진 무게만큼 생각은 책장 사이에 남아 책이 스리슬쩍 도톰해진다. 종종 쓰인 것보다 더 많은 것이 마음에 남는 여러가지 이유 중에 하나가 이 축복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책을 수집하는 것은 위로의 기억을 물리적으로 저장하는 것과 같다. 그 저장 창고 한가운데에서 우는 것은 눈물 흘림과 동시에 위로 받는 것과 같다.
고인이 된 어느 수집가가 어떤 이유로, 전시회를 기획할만큼 많은 미술품들을 모았는지, 그 심정을 정확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어쩌면 작품들 사이로 흐르는 위로의 소리를 모으는 심정이었을런지도 모른다. 특히 조선 후기를 대표하며 민중의 삶을 화폭에 담았던 화가 김홍도의 <추성부도>를 바라보면, 때로는 고독했을 수집가가 그림 속에서 가을의 소리를 듣고 위로 받지는 않았을까 상상해보게 된다. <추성부(秋聲賦)>는 가을(秋)의 소리(聲)를 표현한 시(賦)로, 깊은 밤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리자 선비가 동자에게 무슨 일인지 묻고, 동자는 소리가 숲 속에 있다고 대답했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과연 그림에서는 산 끝자락에 자리 잡은 가옥과, 책을 읽고 있었을 선비, 마당에 서 있는 동자가 그려져 있고, 희연 달과 금방이라도 우수수. 대지로 낙엽을 날릴 듯한 쓸쓸한 나무들이 눈에 띈다. 가로로 길쭉한 화폭 앞에서, 인생의 끝자락, 먹을 갈고 화선지로 시를 그리다 잠시 눈을 감고 뺨을 스치는 듯한 서느런 바람을 느꼈을 그를 생각했다. 버석거리는 건조한 가을 한가운데에서 가느다랗게 마음에 물기가 어렸다. 김홍도는 생몰시기가 명확하지 않고, 다만 말년에 병으로 고통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으므로, 표기 되어 있는 작업 날짜 상으로는 마지막 작품인 이 <추성부도>를 그릴 때쯤의 그는, 아마 쇠락하는 가을 끝자락에 서 있었을 것이다. 그는 가을 소리가 쏟아지는 강호지인을 그리며 자기 자신을 위로하고, 어느 수집가는 그 위로를 가늠하며 닿을 수 없는 강산풍월을 떠올리며 위로 받고, 어느 책 수집가는 떠난 그 모든 이들이 겪었을 비탄을 멀리서나마 위로하고 자신의 비탄을 위로 받았다. 비로소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같은 작품이 어떻게 어린 나를 울게 했는지 이해하며, 가을 숲과 같은 어둠에 파묻힌 그림 앞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전시 <어느 수집가의 초대>는 구성이 뛰어난 전시회라고 보기는 어렵다. 고인이 된 이건희 회장의 방대한 수집품 기증 1주년을 기념하는 기획 전시회로, 아름다운 우리 문화 유산을 중심으로, 모네의 <수련이 있는 연못>까지 다양한 수집품을 선보이고 있지만, 섹션의 주제가 촘촘하지 않고, 따라서 구분이 명확하지 않아 아쉬움을 남긴다. 그러나 성공적이라고 하기 어려운 큐레이션 (따거에 의하면 혹자는 이 전시회를 컨셉이 중구난방인 편집샵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 의견에 일부 동의한다.) 에도 불구하고 작품들을 수집하며 수집가가 받았을 위로를 전달 받을 수 있어 마음이 녹녹해짐을 느꼈다. 자본이 예술과 맺는 긍정적 상호작용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전시회를 보고 나오니까 하늘이 그렇게 청명할 수 없었다. 어두운 회랑에서 나온 가족들, 친구들, 연인들이 혹은 고독한 관람객들이 여름의 파랑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애석하게도 시간은 자애롭기보다는 잔인하다. 시간은 배 아래 깔린 상처를 품고 골짜기를 채워 유유히 흐르는 잔잔한 강물이 아니라, 흠집이 없는 일인 양 모르는 척 시치미를 뚝 떼고 부지런히 상처 위를 쉴 새 없이 달리는 억겁의 물방울들이다. 그래서 그렇게 쇠락한 계절의 증표가 귀에 아직 쟁쟁한데도, 시간은 흐르고, 여름은 청명하다. 골짜기가 넓어지고 수심이 얕아지면 잊고 있던 상처가 너울너울 윤슬 사이로 드러나기도 한다. 시간을 견디는 것은 치유가 아니다. 그리하여 시간을 견디는 우리 삶은 대체로 허무하다. 수많은 뛰어난 수집품들 사이에서 셀 수 없는 위로를 받아도 이름 석자만 남기고 사라지듯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야하고, 그래서 나아간다. <Only Murders in the Building>을 관통하는 메시지 Embrace the mess처럼. <곡성>의 종구(곽도원 분) 처럼. 엉망진창인 슬픔을 껴안고, 뭣이 중헌디에 대답하지 못하는 공포를 등에 업고, 최선을 다해 길을 걷는다. 위로를 수집하고, 소중한 것을 수집하면서 위로 받는다. 가끔 작은방이 주는 위로 속에서 기꺼이 울고 또 일어난다. 가뭄이 오면 묻혀 있던 것들이 몰려 드는 악몽에서 전력을 다해 빠져 나온다. 허망함도 기꺼이 감수하며 온몸으로 삶을 산다. 운명은 가끔 심술궂게 무차별적으로 불행을 쏟아 붓는다. 그러나. 살자, 오늘을. 우리는. 산다, 오늘을. 하늘이 푸르러 눈이 아렸다.
* 카메라에 담았던 작품들. 특히 이중섭 화백과 박수근 화백의 작품들이 마음에 남았습니다.*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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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에 귀하게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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