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픽테토스의 인생을 바라보는 지혜 - 에픽테토스] 우리 숙명은 아직 어리다.
지난 해 겨울, <스파이더맨 노웨이 홈>을 극장에서 여러 번 보고, 후기 글도 여러 편 썼다. 영화를 보면서, 보고 나와서, 오래오래 잔상이 남을 것 같은 인상 깊은 장면이 참 많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계속 예상치 못한 한 장면만이 선연히 떠오르고는 한다.
M. J. (젠다이야 역) 는 그의 피터를 바라 보면서 이야기 한다. "If you expect disappointment, then you can never really be disappointed." 영화 안에서 몇 차례 반복 되는 짧은 라인을 통해 스크린에 미처 담지 못한 작품의 행간에서 그녀가 인종, 성별, 나이, 취향, 신분으로 인한 차별과 스파이더맨의 여자친구라는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얼마나 갈가리 찢겼고, 얼마나 일찍이 체념을 배웠는지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이 장면들은 콜슨 화이트헤드의 <니클의 소년들>의 엘우드, 라이언 존슨의 <나이브스 아웃>의 마르타(아나 디 아르마스 역)가 보여준 통제 불가능한, 속절 없이 이뤄지고야 마는 인생의 잔인한 순간들 앞에서의 무력함이 씩씩하고 쿨한 미국 고딩인 줄만 알았던 M. J.의 무심한 얼굴에 덧입혀져 더 아프게 다가온다. 남과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 받는 것이 운명이라면, 존재는 운명에 순응해야할까. 통제할 수 없는 것이라면 이를 받아들이고, 한발짝 물러나 분노도, 슬픔도 숨겨야 할까. 기대했다가 후에 느낄지도 모르는 실망감을 대비하여, 자발적으로 삶을 기쁘게 하는 요소를 박탈하고, 이 자체를 삶의 기쁨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고난과 상실감은 그저 '삶이 원래 그렇'기에 받아 들여야 하는 것일까. 그리스 로마 신화에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인 스토아 철학을 대표한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이 모든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한다. 내 권한 밖에 있는 것들을 바라지 말고, 힘들고 괴롭다면 내 감정부터 돌아보고, 내게 일어나는 일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남에게 인정 받는 것을 갈구해서는 안된다고 이야기한다. 서기 55년 경 노예 출신의 이 철학자는 어쩌면 M. J. 처럼, 자신이 처한 역경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체념하는 방법을 선택했던 것 같다.
물론, 우리는 인생의 모든 요소를 통제할 수 없으며, 통제할 수 없는 요소 앞에서 고집 부리거나, 화내거나, 마냥 슬퍼한다고 해서, 역경을 이겨낼 수 없다. 따라서, 에픽테토스의 말처럼 때로는 특정 요소를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통제할 수 없는 것을 욕망하지 않고, 절제해야 하는 순간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인생을 이루는 모든 순간과 시간, 선택들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통제의 범위에 달려 있다. 신이 설사 인간과 이 세계를 운명이라는 체제로 프로그래밍 해놨더라도 세부적인 사항의 결정권만은 인간에게 유보했다. 나는 선택적 숙명을 믿는다. 인간은 수많은 선택지 앞에서 한 가지를 선택하고, 그 뒤에 있는 숙명을 맞이하고, 책임지며, 이내 곧 새로운 선택지 앞에 서게 되는 것이라고 믿는다. 존재가 내린 선택 뒤에 설사 피치 못할 숙명이 기다리고 있더라도, 그것은 존재의 선택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굴러 가는 운명 안에서 존재는 또다시 선택을 내릴 것이다. 이 거대한 무대 안에서, 우리는 각자 배역을 선택하고, 바꿀 수 있고, 자유롭게 대사와 지시문을 써내려 갈 수 있다. 나는 에픽테토스의 "인생이라는 연극의 배우에 불과함을 기억하자. 하지만 그 역할 선택권은 내가 아닌 다른 자에게 있다."에 완벽하게 부동의한다. M. J.는 열심히 공부하고 아르바이트도 병행하며 학비를 모았기 때문에 MIT 입학을 욕망할 자격이 있다. 엘우드는 흑인 청소년이 겪어야 하는 운명을 벗어나고자 몸부림치고, 세상을 바꾸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바뀐 세상에서 숨 쉴 권리가 있다. 마르타는 약자이자 소수인 자신을 무시하고 따돌리던 한 일가 안에서 유일하게 사랑과 배려로 외로운 존재들에 손을 내민 선택을 내린 사람이므로 죽은 할런으로부터 물려 받은 집에서 살 권리가 있다. 국민 앞에서면 말 더듬이가 되었던 조지 6세(<킹스 스피치> 콜린 퍼스 역의 실제 모델)는 재위 기간 중 결국 라디오 연설과 버킹엄 궁, 윈저 궁에서의 연설로 국민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데에 성공하였고, 품행이 나쁘다는 평가로 가득한 생기부의 주인공이었던 윈스턴 처칠은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통제 가능한 범위를 조금씩 늘리는 것을 욕망하자. 각자의 방식으로. 잡을 수 없을 것 같은 손을 맞잡자. 높이가 다른 어깨를 잇닿고 걷자. 욕망이 우리를 집어 삼키려고 어두운 아가리를 벌릴 때, 그 때 에픽테토스를 생각하자. 우리 숙명은 아직 어리다.
2021.12.21 - [영화봤다] - [스파이더맨 노웨이 홈] 약스포 후기, 리뷰! 쿠키 두개 있어요! 기저귀, 손수건 꼭 챙겨가세요! 효자 아이맥스 명당 자리 추천!
스파이더맨 노웨이홈 후기 중 첫번째 편
흠스홈에서 커피와 함께 철학 즐기기 :)
망원동에 위치한 작은 서점 로우북스에서 3월 한달간 에릭 와이너의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와 챕터별로 관련 도서를 읽은 후에 모여 토론하는 방식으로 독서모임을 가졌습니다. 의무감으로 독서하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독서모임을 하면서 다양한 관점에 대해서 배우고, 정리하기 위해 글을 쓰게 된다는 점이 굉장히 뜻깊었던 시간이었습니다. 오미크론 때문에 3번 중 마지막 모임인 시몬 베유 파트는 함께 나누지 못했지만요ㅠ.ㅠ
책방지기님께서 만들어주신 발제문에 필기도하고 집에 돌아와 노트에 붙여 정리하면서 저만의 철학을 정리해나가는 과정이 새삼 뜻깊다고 생각했습니다. 생각 정리에도 좋고, 글쓰기에도 좋은 과정이었습니다.
전교일등의 위엄이 드러나는 필기와 정리력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여러분이 읽어주신 글의 초고입니다.
북리뷰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피드백과 질문은 이 글에 댓글로 달아주시거나 인스타그램 seol_vely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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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책, 영화, 드라마, 전시, 음악 등 각종 문화생활을 더 풍부하게 즐기고 싶은 힙한 현대인인 여러분을 위한 큐레이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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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새벽에도 켈리최 회장님 유튜브에서 보내주는 동기부여 모닝콜 영상을 확인하고,
확언 다섯번 쓰기 챌린지를 실시했습니다.
여러분도 함께 하시고, 저마다의 꿈을 저마다 목표한 속도대로, 꼭 이루시길 바라요.
나는 생각을 통해 발전할 수 있어 감사합니다.
I am grateful for being able to develop through ide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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