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래드 37 그릴, Conrad Seoul 37 Gril] 애프터눈 티와 첨밀밀
여의도의 좋은 뷰 포인트에 레스토랑과 바가 참 많지만, 애프터눈티를 즐길 수 있는 여의도 소재 호텔 중에 단연 최고의 전경을 자랑하는 곳은 여전히 콘래드 37층에 위치한 그릴 바다. 지난 주말, 홍콩에서 업무 때문에 잠시 서울에 건너 온 형님 덕분에 콘래드에서 압도적인 전경과 22년의 봄을 기념하기 위해 런칭한지 일주일 밖에 안됐다는 새로운 애프터눈 티 타임 트레이가 인상적인 오후의 티타임을 보낼 수 있었다.
애프터눈 티는 오후 3시 경에서 5시 경 사이에 차와 함께 간단한 간식거리를 즐기는 영국의 전통 문화다. 19세기 영국 귀족 사회에서 유행한 오후에 시나몬 토스트와 홍차(밀크티)를 즐기는 식습관이 애프터눈 티 타임의 원류였는데, 지금은 영국 뿐만 아니라 세계 모든 나라에서 간단한 스낵과 커피나 차 종류, 샴페인이나 가벼운 와인 등을 즐기는 시간을 통칭한다. 즐기기 간편한 스낵을 담은 3단 트레이와 주전자, 티를 서브하는 작은 찻잔이 이 즐거운 오후의 티타임을 상징하는 이미지가 됐다.
내게는 애프터눈 티를 상징하는 다른 이미지가 하나 더 있는데 바로 홍콩의 페닌슐라다. 페닌슐라 홍콩은 1928년 문을 연 홍콩 최고(가장 오래된)의 호텔이자, 최고급 호텔로, 침사추이의 랜드마크로 자리잡은 홍콩 역사의 산증인이다. 페닌슐라는 홍콩 호텔 중에서 가장 큰 수영장, 고급 스파, 최고급 욕실, 탁트인 전망 등 호텔을 유명하게 만든 인상적인 경험으로 가득하지만, 특히 더 로비에서 마시는 애프터눈 티가 굉장히 인상적이다. 홍콩 여행을 앞두고 몇 달 전부터 예약해야하는 경쟁이 충분히 이해갈 만큼 서비스가 빈틈 없이 섬세하고, 티파니의 순은 제품 식기를 이용해 티 타임이 전체적으로 고급스럽고 우아하다.
그러나 이 최고급의 아름다움 이면에는 홍콩이 영국, 일본에 차례대로 수탈 당해야했던 수난의 역사와 본토로부터 독립을 위협 받고 있는 근현대 정치사가 또렷하게 새겨져 있다. 현재는 홍콩, 마닐라, 뉴욕, 베이징, 방콕, 시카고, 파리 등 아시아, 미국, 유럽의 다양한 지역에 호텔을 가지고 있는 홍콩-상항이호텔 그룹(카두리에 가문)이 아편전쟁, 홍콩을 영국에 할양하기로 한 난징조약을 거치며 아시아에서 공고해진 대영제국의 국력을 상징하던 구룡 반도, 미국, 영국의 상선들이 이용하던 페리터미널 앞에 이 호텔을 세웠다는 점부터가 그러한데, 지금은 '클래식'으로 여겨지고 사랑 받는 이 호텔의 애프터눈 티타임을 포함한 모든 문화가 사실은 영국의 홍콩 식민지화의 결과인 것이다. 영국이 홍콩을 통치한지 100년이 되었을 때, 홍콩은 일본에 함락 되고, 페닌슐라 호텔은 동아 호텔로 개명 당한 후 일본군의 통치 거점으로 활용된다. 이후 일본이 패전하고, 다시 영국의 통치를 받던 홍콩은 영화 <첨밀밀>이 대표하는 증권가를 중심으로 한 경제 번영과 쇠락, 본토로부터의 인구 유입과 유출에 따른 다양한 경제, 사회문제를 겪는다. 그리고 199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고 중국과는 일국양제를 시행하면서부터, 2019년 범죄인 인도법(송환법)을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와 시위대를 향한 실탄 사격을 포함한 폭력적인 시위 진압, 당초 송환법 폐지 요구 시위가 민주화 운동으로 확장되는 등의 진정한 '독립'과 관련한 열병을 현재까지도 앓고 있다.
2세기를 건너 영국에서 한국까지, 오후에 차를 즐기는 우아한 문화가 대륙을 건너, 반도를 건너, 귀족에서 평범한 현대인인 나에게까지, 살아남아 건너오는 동안, 찻주전자는 깨지지 않고 버텼다. 반면 애프터눈 티 문화에 편승하고 싶어서 애쓰던 사람들과 그 문화가 민족을 갉아 먹는 것에 저항했던 사람들은 모두 역사 속으로 스러졌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에서 말했던 것처럼 인간이 유전자 보존을 위해 맹목적으로 유전자의 명령을 따르도록 프로그램된 생존기계에 불과하다면 수세기에 걸쳐 차를 나르는 은기 주전자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쓰러져 역사속으로 바스러질지언정 인간은 유전자를 후대에 전하는 생존기계임과 동시에 찻잎에, 차에서 나는 은은한 향기에 잊지 말아야할 정신과 역사를 새길 줄 아는 딜리버다. 유전자의 영혼에 메시지를 아로 새겨 전달하는 주전자다.
최근에 누군가 <첨밀밀> 리뷰를 부탁해서, 몇년만에 다시 작품을 봤다. '역시 난 불륜이랑 맞지 않아.'하고 생각하고 불편해하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인생 영화로 꼽는 이유에 대해서 이제서야 조금은 이해했다. 1986년부터 1995년까지 꼬박 10년간의 한 연인의 기록은 '성공'을 위해, 서울로, 미국으로, 캐나다로 떠났던 우리의 어제와 닮아 있다. 또한 자신이 누구인지, 꿈이 뭔지도 모르고 그저 생존을 위해 열심히 살아남는 데에 집중하는 이요의 모습에서 리처드 도킨스가 지적한 불쾌한 인간의 생물학적 존재 이유를, 세월이 지나 한 시대를 풍미하고 사라져버린 가수의 소식 앞에서 청춘과 이별하는 것은 사실 청춘을 함께 한 많은 존재들과의 이별이라는 일이라는 점을 깨달으며 젊은 시절이 자신에게 남긴 이야기와 인생을 살아가면서 간직해야할 소중한 의미를 신중하게 고르는 연인의 모습에서 우리가 단순히 생존기계가 아니기 위해서 기억하고 간직해야하는 것들을, 깨달았다. 영화를 보면서 우리의 어제와, 오늘을 발견하게 되는 셈이다. 그리고 내일, 어떻게 살아야하는지까지도.
차를 마시면서 통창 밖으로 여의도 공원을 내려다보았다. 3월, 아직 겨울 냄새가 물러가지 않은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사람들이 잔디 밭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한강을 보고 있었다. 그날도 한강 위에는 말없이 오랜 역사가 흐르고 있었다. 차분하고 고급스러운 보라색 벨벳으로 가득한 공간에서, 달큰한 봄향을 품은 머랭과 씁쓸한 얼그레이가 담긴 트레이와 찻잔을 앞에 두고. 애프터눈 티. 다섯 글자에 담긴 과거와 미래를. 그렇게 바라보았다. 멀리 등려군의 월량대표아적심이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내 속에 가득히 찰랑이는 차와 그 위를 동동 떠다니는 찻잎을 안으로 내려다보며, 손 끝이 닿으면 물결치는 잔잔한 표면 위에 잊어서는 안되는 것들을 꾹꾹 새겨넣었다.
다소 부담스러운 날랭과 봄을 기념해서 일주일 전 리뉴얼 했다는 3단 트레이. 봄 향기가 가득하다.
전화로 빈 자리가 있는지 확인해서 당일 예약에 성공했다. 의외로 널널하니까 시도해보시길 :)
2인이 티타임 즐기는 데에 7만 7천원이 소요된다.
안물안궁이지만 글래드 여의도에서 자고 어복쟁반을 먹고 콘래드로 건너갔다.
아직 오미크론의 여파가 남아 있어서 저렇게 사진 찍고 결국 일찍 뻗어버리느라 제대로 호캉스하지 못해서 아쉽다ㅠㅠ
환경도 사랑하는 글래드 여의도.
조만간 또 가야지!
여의도에서 호캉스 한다면 가성비 좋고, 깨끗하고, 환경도 생각하고, 내부에 greets(자느라 예약해놓고 못감....ㅠㅠ), 갓포아키, 블랙바 등 갈만한 곳도 가득한 글래드 여의도를 고려해보자!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피드백과 질문은 댓글로 or 인스타그램 seol_vely로 부탁드립니다.
발전에 귀하게 쓰겠습니다.
+
더불어 책, 영화, 드라마, 전시, 음악 등 각종 문화생활을 더 풍부하게 즐기고 싶은 힙한 현대인 당신을 위한 큐레이션을
카카오뷰 채널 헌책방이 무료로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채널 추가 해주시면 문화생활도 트렌디하지만 깊게 즐기는 데에 도움 되는 인사이트를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오늘 새벽에도 켈리최 회장님 유튜브에서 보내주는 동기부여 모닝콜 영상을 확인하고,
확언 다섯번 쓰기 챌린지를 실시했습니다.
여러분도 함께 하시고, 저마다의 꿈을 저마다 목표한 속도대로, 꼭 이루시길 바라요.
'놀러갔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랜드 머큐어 앰배서더 호텔 앤 레지던스 서울 용산, 슈피리어 스위트] 환대(歡待)의 의미 / 럭셔리 호캉스 리뷰, 후기 (0) | 2022.04.13 |
---|---|
[코트야드 바이 메리어트 서울 타임스퀘어] 호텔과 자기만의 방; 우리가 자기만의 방을 떠나는 이유 / 북캉스 후기, 호캉스 리뷰 (0) | 2022.03.30 |
[살바도르 달리 전시회] 자신이 서있던 경계마저 허물었던, 경계인 달리의 인생과 작품세계, 전시회에서 가장 좋았던 작품 <유령 마차>, 솔직 후기, 리뷰 (0) | 2022.02.04 |
[2022 신년음악회 - 전주시립교향악단] 그날 밤도 하늘에 별이 빛나고 있었다. (0) | 2022.01.26 |
[필라테스 기록] 이것은 고문기계인가, 필라테스 기구인가 (0) | 2022.01.2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