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엣룸 poet room] 창 밖은 시들이 물결 치고 지붕 위는 계절이 지나가는, 거센 파랑(波浪) 끄트머리, 하얀 해변
"무슨 사람이 이렇게 많아." 골목을 떠나는 겨울이 미련이 가득 담긴 발걸음으로, 눈꽃으로 닿았던 어느 벽과 고드름으로 얼었던 어느 처마 끝을 손끝으로 만져보기도 하고, 하나씩 눈에 담아보기도 하면서, 떠나고 있었다. 눈꽃 대신 거리 가득 내릴 꽃비가 질투나는지, 바람이 보도 블럭 위를 괜시리 쌩, 쌩. 거리며 돌아다녔다. 사람들의 옷이 출렁출렁 춤을 췄다. 주춤 거리던 봄은 겨울의 맹렬한 여운에 겁을 잔뜩 먹고 작전을 바꾸었는지, 확 다가오지 않고 슬그머니, 엉금엉금. 떠날 채비를 하는 겨울 주변에 모여들었다. 겨울이 약해지길 기다렸다가 홱 자리를 차지할 심산이다. 봄은 말갛고 상냥하기 위해, 가끔 손톱을 숨기고 옹그리는 순간을 보낸다. 상춘. 봄 구경을 하러 미처 멀리 나가지 못했거나, 꽃샘추위에 코끝이 시려워서 산천 대신 어여쁜 이의 얼굴에 핀 꽃을 보려고 도시에 남은 사람들로 골목마다 물결 쳤다. 물결 위를 겨울이 신나게 겅중댔다.
물결에 떠밀려, 어느 작은 해변에 닿았다. 포엣룸(poet room). 문래동에 새로 둥지를 튼 카페였다. 겨우내 동네를 오가면서 남매인지, 연인인지, 친구인지, 남녀 한쌍이 공사에 매달리고 있는 모습을 곁눈질 했었는데 겨울이 아직 한참 골목대장 노릇을 하던 1월의 어느 날 오픈한 모양이었다. 시인의 방 답게 곳곳에 시집과 숲을 닮은 메모지, 윤동주의 시가 적힌 볼펜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리고, 미장센(Mise-en-Scène). 방 안에는 미장센이 있었다. 연극무대에서 쓰이는 프랑스어로 무대에 배치한다, 라는 의미에서 연출이라는 뜻으로 쓰이던 이 단어는 사진과 영상문화가 인간의 생활 깊숙이에 침투하면서 점점, 프레임 속에 구성 요소를 어떤 식으로 배치하여 감독과 작가의 시선과 주관을 전달할 것인가의 문제로 진화했다. 미장센이 뛰어난 현대 영화를 꼽을 때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설국열차>, 웨스앤더슨 감독의 <그랜드부다페스트호텔>, <프렌치 디스패치>,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 <화양연화>과 같은 작품이 꼽히는 이유는 단순히 영화의 장면들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구성요소 자체, 요소간 관계, 프레임 내 요소의 역할을 세밀하게 연구, 디자인, 배치하여 장면 자체가 제작자의 메시지와 철학을 드러내도록 하기 때문이다. 시인의 방은 훗날에 기억할 때 먼저 생각날만한 장식물, 구조물, 소품들을 배치하여 이 공간이 문 밖의 인파, 세계에 부는 폭력의 풍파, 겨울이 부리는 심술 궂은 파랑으로부터 안식할 수 있는 '자기만의 방'임을 표현한다. 짙은 파랑 끝에 만난, 하얀 해변. 잠든 분화구 안에 지친 시인들의 발걸음 끝이 옮긴 모래가 쌓여 있고, 가운데 놓인 조개가 제 혀를 녹이고 살을 뚫는 깔깔한 모래알을 보듬어 안아 만든 진주를 말꼼히 세상에 자랑한다.
poem(시, 주로 한 편)는 고대 그리스어 poeima를 어원으로 하는데, poeima는 동사 poieo, 만들다라는 뜻의 고대 그리스어에서 파생됐다. 이것이 라틴어 poema를 거쳐 현대 영어의 poem이 되었다. 그러니까 시는 '만듦'을 함의하고 있다. poet(시인) 역시 창작가, 발명가 등 만드는 사람을 가르키는 고대 그리스어 명사 poiets를 어원으로 한다. poiets 또한 예의 poieo에서 파생 되었으니, 시인 또한 '만듦'을 함의한다. 진주든, 물기 어린 창문 앞에 앉아 연필로 사각사각 종이를 밀어 쓴 짧은 일기든, 달뜬 마음으로 보낸 물기 어린 카톡이든, 만드는 자가 마음으로 품어 세상에 내보냈다면 그것이 시가 아니라 무엇일까. 시를 만들어 마음 밖에 내놓으며, 한숨 쉬고, 걱정하고, 웃고, 기뻐하는 사람들이 시인이 아니라면 누구일까. 한 눈에 봐도 50대 중반쯤 된 여성 세 분이 한참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누군가에게는 미래, 누군가에게는 과거에서 온 시의 한 장면이었다. 사람으로 완성된 미장센 앞에서 포엣룸(poet room)에 가득 앉은 시인들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삶이 한편의 시고, 연극이고, 영화고, 결국 어떤 이야기가 맞다면, 이 장면 속에 누구를, 무엇을 어디에 어떻게 둘 것인가 만큼 이야기를 완성하는 데에 중요한 문제가 없다. 우리는 무대 한가운데에 있다. 칼바람을 뚫고 한줄기 햇살이 좁은 골목을 지나는 시간인지 눈이 부시다. 눈을 감고 내가 놓일 장면(Scène)을 생각해본다. 창 밖에 시의 바다가, 물결 친다. 멀리서 물결 위를 어린 봄 기운이 아장아장 걸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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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락방 같은 공간이 있어서 올라가 구경했다. 아무도 오지 않고, 침대도 없고, 세상과 연결고리라고는 사다리 하나인 이런 방이 있으면 하루종일 글을 쓰면서 살 수 있겠다. 생각했다.
2.
커피 정말 맛있었는데, 사진은 그래보이지 않아서 속상하다. 사진은 타고난 재능이 없으면 잘 찍을 수 없는 것인가보다. 요즘엔 체념했다. 어떻게 잘 찍어보려고 해도 안된다.
3.
포엣룸 한가운데에 놓인 메타포. 미장센을 완성 시켜 줄 누군가를 기다리는, 구성요소.
4.
포엣룸은 비건을 지향하는 공간이라 빨대도 쌀로 만든다고 한다.
5.
따뜻한 커피. 맛있었다.
6.
사장님이 직접 만들었다는, 비건 쿠키. 쿠키도 역시 맛있었다. 혼자 와도 세조각 쯤이야 뚝딱 해치울 것 같다.
7.
다시 다락방, 책들이 겹겹 살을 맞대고 쌓여 있다.
8.
여기저기 시집이 있었다. 50대 중반 쯤으로 추정되는 여성 세 분이 들어와서 서로 사진도 찍고, 거울 샷도 찍고, 온갖 감성샷을 다 찍으셔서 멀리서 우와, 인플루언서이신가봐. 하고 감탄했는데, 저 쿠키 담긴 그릇도 그들이 시집을 살짝 밀고 배치한 결과다. 미장센.
바람이 시를 다 쓸어갈까봐 문진 대신 무심히 책장 위에 올려 놓은 조약돌이 예쁘다.
9.
1층에도 테이블마다 기본 한권의 시집이 놓여 있어서 사장님이 시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었다.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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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에 귀하게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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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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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새벽에도 켈리최 회장님 유튜브에서 보내주는 동기부여 모닝콜 영상을 확인하고,
확언 다섯번 쓰기 챌린지를 실시했습니다.
여러분도 함께 하시고, 저마다의 꿈을 저마다 목표한 속도대로, 꼭 이루시길 바라요.
나는 시간의 유한함을 알고, 시간을 주체적으로 사용합니다.
I am aware of finitness of time and use it initiative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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