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부커상은 영국에서 출판된 영어 소설을 대상으로 그 해 최고의 소설을 가려내는 영국의 문학상으로,
전 세계적으로 그 권위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세계 3대 문학상으로 이 맨 부커상, 노벨 문학상, 공쿠르상이 꼽힙니다.
부커라는 이름은 출판과 독서증진을 위한 독립 기금인 북 트러스트의 후원을 받아 부커 그룹이 주관하여 운영한 것에서 유래되었습니다.
2002년부터는 금융기업인 맨 그룹이 상금을 후원하게 되면서 명칭이 부커상에서 맨 부커상으로 바뀌게 되었으나,
2019년 맨 그룹이 후원을 중단하면서 다시 부커상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처음 시작할때는 영국, 아일랜드, 짐바브웨 국적의 작가들만을 대상으로 심사 및 수상을 하였으나
2013년부터는 작가의 국적과 상관없이 영국에서 출간된 모든 소설을 대상으로 심사 범위를 넓혔습니다.
2005년부터는 맨 부커 국제상(Man Booker International Prize)이 추가로 만들어졌습니다.
1997년 아룬다티 로이의 <작은 것들의 신>이, 2005년에는 존 밴 빌의 <바다>가 이 상을 수상하였고,
페시 또한 이 작품들을 굉장히 감명 깊게 읽은 바 있습니다.
오늘 함께 음미해 볼 책은 2016년, 맨 부커 국제상을 수상한 최초의 한국인 한강의 작품
<채식주의자>입니다.
감상은 2017년 2월 10일, 벌써 3년 전, 인스타그램에 올렸던 글을 그대로 옮겨왔습니다.
최근에 책을 덮고 이렇게 착잡한 때가 있었던가.
내가 그간 읽어 온 책장을 넘기면서.
생각한다.
살면서 이런 기분은 처음이라고.
양치를 하며 착잡함의 원인에 대하여 곰곰 생각에 잠겼다.
이 착잡함은.
날씬한 몸, 좋은 직업, 행복한 얼굴 같은, 오랜 세월 사람들이 만든 정상적인 삶의 기준에 억지로 나를 구겨 넣으며 해왔던 선택들에 대한 지독한 자기 연민 때문이기도.
남을 바라보며 정상적인 삶과 비정상적인 삶으로 잣대를 들이대던 폭력적인 모습에 대한 반성 때문이기도.
그저 고기가 먹기 싫어 채식을 선택했을 뿐인,
내 위에 고기를 담기 싫었을 뿐인 수많은 사람들을
채식주의자라고 이름 붙이는 사회의 일원이라는 서글픔 때문이기도 하다.
누가 봐도, 명백하게, 평범했던 삶에도.
갑자기 균열이 생길 때가 있다.
정상적인 사람이 하루아침에 비정상으로 바뀔 때가 있다.
평범해서 그 남자의 아내로 선택되었던 영혜는 돌연 나무가 되기로 결심한다.
고기를 먹지 않다, 말라가다, 광합성을 하다가.
곡기를 끊고는 서서히 나무가 되어간다.
누군가는 그녀의 변화에 이름 붙여야 하기에.
그녀는 채식주의자가 되었다가, 정신병동에 갇혔다가, 환자로 불린다.
그렇구나.
그러다가 돌연, 한 가지 생각이 찾아온다.
영혜는 왜 비정상인가. 그녀의 선택은 왜 균열이라고 불리우는가.
온전히 그녀의 선택만으로 이루어져야 할 그녀의 삶에서 그녀는 선택을 했을 뿐이다.
그 선택에 누군가가 어떤 자격으로, 채식주의자라는 이름을 붙일 수가 있을까.
그 선택에 누군가가 잘못되었다는 판단을 가져다 붙이며, 몇 가지 알약을 처방할 수 있는가.
편의를 위해 누군가에게 붙이는 이름은 이토록 당연하게도 폭력적이다.
어쩌면 나무의 심장이, 세상의 어떤 동물의 심장보다도 가장 세차게 뛸지도 모른다.
물구나무를 서서 다리를 하늘로 뻗은 채 심장 소리가 나무껍질 사이로 새어나갈까 숨 죽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시퍼런 동맥이 보일까 무서워 잎사귀를 무성히 드리우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 안의 그것이 나무가 되었든, 호모 사피엔스든, 코끼리든지 간에.
심장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눈을 맞추고.
그 작은 박동이 만든 음악소리의 볼륨을 키우고.
춤을 추거나. 눈을 감고 발이나 고개를 까딱이거나.
미동도 없이 가만히 선율을 나누거나.
그 요동치는 고요함 속에서 손만 잡고 있어도 충분하지 않은가 생각해본다.
존 밴 빌의 <바다>를 읽은 영향으로, 작년 내내 수많은 매스컴과 심지어 뉴욕타임스까지 언급하는데도 별반 관심을 갖지 않았던 책을 꺼내 들었다.
맨 부커와 노벨문학상의 큰 차이점은 맨 부커는 후보작 선정부터 최종 수상작까지 수상까지의 과정이 전면적으로 공개 되는데 반해 노벨은 수상자만이 발표된다는 점이다.
노벨문학상의 수상 후보자들은 거의 도박사들이 결정한다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후보작들을 면밀히 살펴볼 맨부커 관계자들의 열린 홍채와 까만 동공을 생각하며 가느다란 흥분을 느꼈었고,
<바다>를 읽으며 감히 내가 그들의 노고를 이렇다 저렇다 할 수 없음에도.
탁월한 안목이라며 무릎을 탁 쳤었다.
그래서 읽게 된 것이 한강의 <채식주의자>다.
오랫동안 고전을 고집했던 것은 친구가 지나가는 말로 비꼬았던 사대주의적 성향 때문도,
아빠가 투덜대며 말했던 고리타분한 취향 때문도 아니었다.
<아리랑>, <혼불>, <태백산맥>, <토지> 같은 역사를 기반으로 한 팩션과 사회를 들여다보는 작가들의 형형한 눈길이 못내 시려웠던 탓이었다.
나는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작품을 덮고 난 지금도 모르겠으며, 어쩌면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눈을 감을지도 모른다.
내면을 들여다보는 돋보기에 목말랐던 탓에 선택했던 것이 고전이었다.
사회가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달라도, 사람이 사는 모습은 같다는 믿음이 있었고,
내면에 집중하는 성향의 작가들의 작품을 고르고 골라 선택해왔다.
단언컨대 나는 그동안 단단히 착각을 해왔다.
작가는 내가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쓰인 글로, 영혜의 위장을 긁어내듯,
나의 내면도 긁어놓았다.
착잡함이 서서히 가라앉고.
감정의 앙금을 식혀 녹색 그릇에 담으며.
그릇의 남은 자리에는 오로지 내 안의 줄기에서 터져 나온 열매만을 담게 되기를 소망한다.
그 노고를 응원한다.
그리고 다른 나무에 열릴 그 열매들에게도 내게 내린 것과 같은 햇살과 빗줄기가 함께하기를.
열차에 올라탄 옆 화분의 나무가.
옆 자리의 호모 사피엔스가.
옆 자리의 코끼리가.
어떤 눈길로 바라봐도.
개의치 않는다는 듯, 당연하다는 듯이. 열매가 열리기를.
요즘 같이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날로 푸르러지는 나무들을 바라보며 읽기 좋은 책입니다.
맨 부커상 수상작 특유의 생생하고 세밀하지만, 감정에 날이 서게 하는 묘사가 인상적인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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