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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었다

[무진기행 - 김승옥] 오늘 오후엔 안개가 걷힐까요

by 헌책방 2021. 10. 14.

오늘 오후엔 안개가 걷힐까요 / <무진기행>-김승옥

나는 이따금 수심이 두터운 심연의 끝에 누워

연못만큼이나 두껍게 배를 깐 안개가 드리워진

수면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에 들 때가 있다.

내가 어릴 때 우리 엄마는 안개가 많이 끼는 날이면,

"오늘 낮에는 날씨가 좋겠구나. 조금 덥겠어."

하면서 나의 머리카락을 양갈래로 묶어주시거나

날이 더워지면 겉옷을 벗고 뛰놀 수 있도록

안에 얇은 옷을 입히고 '잠바'를 입혀주셨는데

나는 늘 그냥 집으로 돌아갔다.

안개가 걷히지 않을 것만 같아서.

실제로는 늘 엄마 말씀처럼 날씨가 좋았다.

이십여년이 지난 지금도 아침에 안개가 끼면

'날씨가 좋겠구나.' 속으로 생각 하면서도

안개가 영원히 걷히지 않을까봐 걱정한다.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나는 이따금 안개에 가려 햇빛 한점도 들지 않은

심연에 등을 대고 누워

아무도 듣지 못하는 울음소리를,

아무도 듣지 못하도록,

흑흑 하고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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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 있는 리뷰-------------

<무진기행>은 우연히 떠난 고향으로의 여행에서 뜻하지 않게 자아를 발견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와 선입관, 결국 자아를 외면하고 현실로 도망가고 인간이 숙명처럼 타고 태어난 고독함과 패배주의에 젖는, 윤희중의 짧은 여행기를 김승옥 선생님 특유의 적확한 국어적 표현과 시간과 공간, 의식의 흐름을 적절히 배합하여 몰입감을 유도하는 문체로 그려낸 작품이다.

전국의 한국 문학 독자들에게 가상의 지명인 무진과 안개가 하나의 이미지로 기능하도록 만들어버릴만큼 대단한 영향력을 자랑하는 이 작품은, 실제로도 가상의 공간인데다 안개에 묻혀 있어 비현실적 이미지로 대표 되는 무진읍이 사실은 윤희중이 자신의 밑바닥을 발견하고 심연의 끝에서 자신에게 몰두하여 결국에는 자아의 합일을 이룩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고 반대로 안개 한 점 없고 '돈 많고 능력 좋은 과부'를 만나 결혼하는 것이 엄청난 성공으로 여겨질 만큼 타산이 분명한 서울이 사실은 본질적 자아로부터 도망쳐 숨어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고 알고자 노력하지도 않는 자신에게 삶을 맡기고 행운을 빌어야하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시각적으로나 비유적으로나 아이러니가 돋보이며, 개구리 우는 소리가 별빛으로 쏟아진다던지 담배 냄새가 손끝에 닿는다던지 하는 청각이 시각화, 후각이 촉각화 되는 공감각적 표현이 인상 깊고, 윤희중이 하인숙을 만나면서 자신이 어떤 삶을 살고 싶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자신의 자아를 누구인지 깨쳐가지만 사회 구조적 문제,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이슈들 때문에 결국 자아를 잃은 삶을 선택하는 측면에서 몰개성, 자아의 상실, 이로부터 비롯되는 패배주의, 자기자신으로부터마저 느끼는 외로움, 고독감 등 현대사회인들이 겪고 있는 문제들이 결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거시적으로 사회전체로 확대된 시각에서 접근해야 하는 이슈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어, 작품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작품이 쓰인 시기가 1964년이라는 점에서 오랜 시간 침묵하는 선생님의 작품이 아직도 살아 있는 이유를 실감한다.

 

윤희중은 하인숙의 손을 잡는다.

자신을 닮은 그녀의 손을 잡고,

흐린 날에는 헤어지지 말자고.

전하지 못할 말을 삼킨다.

서울로 돌아오라는 전보 앞에서

나 자신을, 무진에서 느끼는 이상한 기분의 이유를 외면하지 않겠다고

지켜지지 못할 다짐을 한다.

결국 하인숙에게 편지를 쓴다.

자신을 닮은 그녀를 데리러 오겠다고.

구해주겠다고.

그리고 전해지지 못할 편지는 찢기고 만다.

윤희중은 자기 자신을 구하러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구해주겠다고 편지하지 않았을 것이다.

 

새벽녘에 안개와 서리가 내리는 날씨가 되면 김승옥 선생님의 <무진기행>과 무라카미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를 읽는다.

김승옥 선생님은 신문사에 소설을 연재하다가 중단, 생계 유지를 위해 영화 각본에 열중해서 소설을 쓰지 못함, 이어령 선생님께서 호텔을 잡아주고 밥값까지 내줘도 부담감을 이유로 도망, 이 후 또다시 이어령 선생님께서 신문사 편집자와 관계자를 보조자 명목으로 사실은 감시자로 두고자 김승옥 선생님의 옆방에 숙박시키면서 두 개의 방 값을 지불하면서 지원했지만 이미 0장만으로도 완성형 소설을 써내버려 장편 계획이었던 작품을 더 이상 진전시키지 못해 단편으로 만족하고 작전 중단, 같은 이유로 주로 단편들을 써내셨고, 그후로 신실한 기독교인으로의 삶에 몰두하고 작품을 내고 계시지 않기 때문에, 대표작 <무진기행>을 포함한 모든 단편들은 아껴 읽혀야 하는 운명을 타고 났다.

그럼에도 아침에 안개가 끼는 날씨가 되면 어김 없이 작품에 손이 가니 조절할 수 없는 마음이 참 이상하다.

잠이 깨어 뒤척여도 잠들 수 없는 새벽, 베란다 밖에 안개가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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