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먹어봤다

[아란 마스터 오브 디스틸링 II(Arran Master of Distilling II - The Man with the Golden Glass)] 마스터의 맛

by 헌책방 2021. 12. 4.

[아란 마스터 오브 디스틸링 II(Arran Master of Distilling II - The Man with the Golden Glass)] 마스터의 맛

바로 향하는 발걸음을 뗄때마다 입김이 쏟아져 나오는 밤이었다. 아람으로 향하는 발걸음 바로 뒤에 맥베스의 대사가 따라오는 것 같았다. <맥베스>는 손의 피를 씻으려고 할 수록 피가 더 많이 묻고, 묻지 않은 쪽으로 번지자 괴로워하는, 넵튠에 손을 담가 씻으면 넵튠이 오히려 붉게 물들것이라고 공포에 질리는, 그러면서도 욕망을 뿌리치지 못하는, 인간 본성을 적확히 그려낸 셰익스피어의 마스터피스고, 그 작품을 무대 위에서 상연하는 극단 또한 대단했다. 누군가의 인생에 유의미한 깨달음을 남기는 경험을 공급하는 삶은 어떤 질감일지 궁금했다.

아란에 대해서는 몇차례 블로그 포스트에서 언급한 적이 있다. 요는 아란 섬에서 증류소들이 위스키를 만들다가 19세기 초 중단 되었고, 1993년 다시 아란 섬에 로크란자 증류소를 설립하여, 비냉각여과, 색소 무첨가 등 인공적 요소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위스키를 만들기 시작하여 특유의 (뻥)피트감, 하이랜드와 스파이사이드 수준의 풍미, 특유의 스파이시 향 덕분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세계적인 증류소가 되었고, 남부에 라그 증류소를 설립하게 될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2021.11.20 - [먹어봤다] - [문래 무정형 위스키 & 칵테일 바] 아란 아마로네 캐스크 피니쉬 후기

 

[문래 무정형 위스키 & 칵테일 바] 아란 아마로네 캐스크 피니쉬 후기

[무정형 위스키 & 칵테일 바] 아란 아마로네 캐스크 피니시 후기 (Arran Amarone Cask Finish) 아란 아마로네 캐스크 피니쉬는 전통 오크 캐스크에서 8년 동안 위스키를 숙성하다가, 최고급 품질

festivalsisters.tistory.com

 

아란 마스터 오브 디스틸링 II는 전통적인 증류법을 고수한 아란의 마스터 디스틸러 James Mac Taggart가 로크란자 증류소 설립 12주년을 기념하여 출시한 싱글 몰트 위스키다. 현재 로크란자의 마스터 디스틸러 자리는 라프로익 출신의 데이비드 리빙스턴이 맡고 있다.

아무튼 산 위에서 떨어질 때 이탄(peat)에 의해 부드러워지고 화강암에 의해서 깨끗하게 정화된 물을 써서 위스키 생산에 완벽함을 더할 정도로 꼼꼼하게 증류소를 지휘하는 마스터의 이름을 걸고 나온 위스키니까 기대가 될 수 밖에 없다. 위스키도 어쩔 수 없이 '제품'인지라 패키지가 중요할 수 밖에 없는데, 박스 전면에 등장하는 황금빛 잔을 든 남자분이 바로 마스터 디스틸러 제임스고, 귀엽다는 인상이 제일 먼저 들긴 하지만 따뜻함, 자신감, 그리고 묵직함이 사진을 통해서도 느껴진다.

웃으면 안되는데 마스터님 너무 귀여워서 웃기부터 하게 된다. 귀욤귀욤

 

제임스는 스페인 Jerez de la Frontera에서 엄선한 셰리주, Palo Cortado의 캐스크를 이용하여 피니시해서 전반적으로 위스키가 달콤하고 따뜻하지만, 더불어 꼬르따도 특유의 떱떠름한 향을 입혀 새로운 느낌의 아란을 만들었다. Palo Cortado는 드라이 스타일의 셰리주로 셰리 포도의 단 2%만이 Palo Cortado에 사용돼서 매우 희귀하다고 한다. 그러니까 위스키 피니시 캐스크로 사용되는 경우가 거의 케이스 0에 수렴하는 캐스크를 사용해서 유니크한, 내가 환장하는 희소성 높은, 한정판 위스키를 탄생시킨 것이다.

 

위스키 공부는 바틀 앞뒤 라벨을 자세히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끝낼 수 있다는 것이 게으른 나의 생각이다.

2006년에 증류하여 2019년 역시 비냉각여과, 색소를 첨가하지 않고 51.8% ABV(Alcohol By Volume, 알코올 도수)의 내츄럴 캐스크 스트렝스(CS)로 병입하여, 전세계에 단 12,000병만을 생산, 공급한 리미티드 에디션이다.
일단 색깔은 부제(The Man with the Golden Glass, 황금잔을 든 사람)와 어울리고, 무색소라고는 믿기지 않는 밝은 금빛을 띄고 있다. 향은 전반적으로 달콤한데, 우디한 아로마향이 느껴진다. 스타트는 약간의 펑크와 함께 바디감이 톱톱(얕지 않은데 그렇다고 바디가 묵직하다고 하기는 어려운)하고, 미들은 스타트의 펑크가 유지 되면서 아로마, 과실, 건조한 새콤함, 미세한 짭쪼롬함과 스모키함이 레이어링 되다가 피니시는 셰리 캐스크 특유의 따뜻함과 달콤함의 풍부한 풍미와 꼬르따도의 떫떠름함의 영향으로 추정되는 생강과 사과의 드라이한 떫음의 인상적인 여운을 남긴다. 정확히 맛을 묘사할 수 없어 답답한데 피니시가 위에 셰리 특유의 달콤함을 얹은 사과와 생강맛이 나는 따뜻한 종이를 전자레인지에 10초 정도 돌리고 물고 있는듯한 느낌이다. 국내 유통량이 많지 않다보니 이 글을 읽는 사람들과 나 조차도 언제 다시 접할 수 있을런지 모르겠지만 기회가 된다면 꼭 경험해봐야할, 또 경험해볼만한, 특별한 경험이었다.

 

이 날도 많이 마셨구나! 그래서 빙글빙글 한건가!

패키지 위에서 옅게 웃는 마스터를 보면서 생각했다. 어떤 일에 권위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자신의 이름을 걸고 전세계의 새로운 경험을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공급하는 일은 그 사람 자신의 인생을 얼마나 많이 바꾸게 될까. 상상만으로도 짜릿해짐을 느끼면서, 나는 오래 바에 앉아 위스키를 꼭꼭 씹었다. 아란, 마스터 디스틸러, 셰익스피어, 전주시립극단이 아로마도 되고, 펑크도 되고, 떫떠름한 달콤함도 되면서 입 천장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참고로 아람 위스키 바에서는 위 마스터 오브 디스틸링을 판매하고 있지 않습니다. 친분 덕분에 공부 차원에서 한모금 마셔봤어요!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