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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 톨스토이] 진정한 죽음의 의미

by 헌책방 2022. 1. 18.

[이반 일리치의 죽음 - 톨스토이] 진정한 죽음의 의미


자신이 살고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뿐만 아니라 모스크바까지, 빼어난 미모를 주무기로 러시아 전역의 사교계 명사 자리에 오른 한 여성이 있다.
정부의 고위 간부인 남편과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친인척들도 공작지위를 가지고 있는, 소위 다이아수저가 된 그녀는, 모스크바에서 한 남자를 만나게 되고, 그 남자와 사랑에 빠지면서 자신의 남편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음을 깨닫는다. 
그녀는 애인과 외국으로 도피하고,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하지만 남편은 이혼을 받아들여주지 않는다. 결국 그녀는 남편의 반대와 사교계의 따가운 시선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빠진 남자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기에 이른다.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남편과의 이혼은 점점 더 요원해지고, 남편과 낳은 첫 아이에 대한 그리움, 이혼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오는 히스테리, 타인의 눈총 때문에 그녀는 점점 더 애인에게 집착한다.
그녀의 집착이 심해질수록 애인의 마음은 차가워지고, 그녀의 남편에게 그들의 불륜에 대한 용서를 구하기까지 한다.
자신이 살고자 하는 삶, 자신이 좋아하는 것, 자신이 싫어하는 것, 자신이 독립한 존재로 갖는 고유한 가치, 자신의 자아를 들여다보지 못했던 그녀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타인의 시선 등 외부적 요소를 끌어들여 자신의 존재 의미를 확인하고 자신을 완성하고자 평생을 발버둥친다.
영겁의 세월을 살아도 자아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한다면, 찰나의 순간마저도 온전한 자신의 시간이 될 수 없다. 숨을 쉬어도 자아가 잠들어 있는 그 순간, 당신은 죽음 위에 있다.
이는 고전문학 역사상 가장 불행했던 안나 카레리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자신을 외면하고 스스로 죽음으로 몰아 붙였던 안나 카레리나이기도, 욕정, 명예, 권력, 재산 같은 가치 때문에 안나가 자신을 찾지 않는 모습을 묵인했던 카레닌, 브론스키이기도, 안나가 자아와 합일하여 스스로를 완성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도록 하고, 손가락질과 눈총으로 그녀의 삶을 좌지우지 했던 사교계 명사들일 수도 있다. 그리고 책장 너머, 타인에 시선에 갇혀 그녀가 자신의 삶을 찾아 떠나지 못하도록, 밀폐된 구조를 만들어낸 누군가일 수도 있다.
죽음의 순간에서야 자기 자신에게 가 닿을 수 있었던, 차가운 철로 위에 누운 그녀에게, 나에게, 우리에게, 괜찮다는 편지를 쓴다. 그 동안 수고했다고. 헛되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순간마저 이 순간을 위해 존재했어야 했다고. 자아와 화해하고 하나가 되기 위한 이 긴 여정을 빙글빙글 돌아 해내느라 정말 고생 많았다고.

톨스토이의 역작 <안나 카레리나>는 언뜻 보면 진정한 의미의 사랑을 탐구하고 강렬한 파토스(페이소스)를 담은 비극적 연애소설로 읽히지만, 깊게 읽으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진정한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삶이란 무엇인가?', '진정한 죽음은 무엇인가?', '인간의 내재적 가치는 어떻게 결정되는가?'와 같이 톨스토이가 평생 문학을 통해 던져 온 전 인류의 '진정한 생존'과 관련한 철학적 화두를 발견할 수 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안나 카레리나>의 이야기가 함축되고, 약간의 변주를 거쳤으나 톨스토이의 문학 인생을 지배했던 철학적 고찰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는 역작이다. 작품은 <부활>이나 <안나 카레리나> 같은 장편도 아니고, 플롯이 정교하고 복잡하지는 않지만, '죽음'에 초점을 맞춰 한 인간이 사회적으로 죽어가는 과정을 세밀하게 관찰하여 톨스토이가 중단편 길이의 작품만으로도 다른 대작과 같은 깊이의 철학적 고찰을 해낼 수 있는 대문호였음을 증명한다.
이반 일리치의 삶은 남들 시선에 특정 방면이 어떻게 비치느냐에 따라서 미세하게 조정되고 결정되었다. 그는 명예, 권력, 사교계에서의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공무원(당시 러시아 행정조직 안에서는 관료체계를 넘나드는 보직 변경이 가능했다. 이반은 지방자치단체의 간부, 검사, 판사를 거친다.)이라는 직업을 선택하고, 남들 보기에 창피하지 않고 이만하면 괜찮다는 생각이 들어서 결혼을 하고, 남들 보기에 부유한 삶을 살고 싶어서 돈을 쫓아 근무 환경을 바꾼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높은 월급을 주는 자리에 부임하여 집을 새로 사고, 셀프 인테리어를 한다. 인테리어 중에 사다리에서 낙상하여 복부를 다치지만 개의치 않을 정도로 통증은 약하다. 아름다운 집, 오랜만에 찾은 가정의 평화, 불화로부터의 도피처로 선택하긴 했으나 업무의 순항 덕분에 그는 자신의 삶이 행복의 절정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순간 그에게 죽을 듯한 고통이 찾아온다. 아편, 모르핀 투약에도 고통은 멎지 않고, 군중속의, 완전한 고독 속에서, 그는 쓸쓸히 자신의 삶이 이미 죽어있음을 확인한다.
타인의 시선을 기준으로 결정 짓고 꾸려온 삶은 이미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신념 없는, 수동적인, 생동감 없는 그의 인생은 이미 죽은 후였다. 자신이 그토록 열정적으로 살아온 삶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이미 죽음은 끝났음을. 그는 죽음을 직면하면서 깨닫는다.
죽음을 직면하면서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이미지들을 경험해 본 적이 있다. 2014년, 귀 뒤에 난 작은 뾰루지가 겉잡을 수 없이 커지다가 이내 귀만큼 커졌다. 피부과에서는 2차병원으로, 2차병원에서는 대학병원으로 가져갈 소견서를 써주었다. 교수님은 내 눈을 보면서 말했다. 림프에 종양이 있는 것 같습니다. 책을 많이 읽은 보람이 있었다. 그 말의 무게가 어떤 것인지 알았다. 같이 진료실에 들어갔던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아버지는 수화기 너머로 오열했다. 다행히 내 뾰루지는 잘 제거되었다. 림프 쪽에 있었지만 림프에 난 종양은 아니었다. 그러나 진단이 정정 되기 까지 3일 동안 나는 죽음의 눈동자를 쳐다봐야 했다. 항생제 부작용에 시달리며 5개월 간 사전치료를 받고, 수술 동의서에 사인을 하고, 수술을 받은 후 전신마취에서 깨어난 나는 그 길로 사법시험 응시를 그만두었다. 내 인생을 아버지가 결정하거나 타인이 생각하는 대단한 삶의 기준에 맞춰 운영할 수 없었다. 진짜 죽음은 그런 것이었다. 에밀 졸라의 책을 읽고, 톨스토이의 역작 속에 사는 이반과 나는, 죽음에 직면하고 나서야 어떤 삶을 살아야하는지 알게 되었다. 이 나침반을 손에 쥐고도 자꾸 길을 헤매서 가끔 속상하다. 그러나 괜찮다. 다시 또 내가 살고 싶은 삶을 들여다보고 출발하면 되니까.
우리는 복잡한 철로 위에 있고, 누군가는 철로 위에 누워 눈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며 마지막 숨을 쉬기도, 누군가는 활로를 개척하며 생동감 있게 철로를 내달리기도, 누군가는 타인이 놓아 둔 철길 위를 달리기도 한다. 이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바로 지금, 이 순간부터다. 아직 연료가 남았다.

 

 

 

그리고,
목표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더 큰 동력을 얻기 위해 병행하면 좋은, 켈리최 회장님의 확언 반복 쓰기를 공유합니다.

저는 새벽에 일어나서 가벼운 요가, 스트레칭 후에 이 반복해서 읽고 쓰기를 하면서 하루 에너지를 얻고 있어요.

나는 문제를 해결하는 아이디어를 통해 나 자신과 세상을 이롭게 합니다.

I create a positive impact on myself and the world through problem-solving ideas.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나누고 함께 성장하는 따뜻한 겨울 보내고 싶어서 공유해요 :)

저도 그런 글을 꾸준히 공유할 수 있도록 공부 열심히 하고, 책 많이 읽고, 글 열심히 쓰고, 내년에 선보일 <<<북 바>>> 열심히 준비하겠습니다 :)

오늘도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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