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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인, 재욱, 재훈 - 정세랑] 작은 힘의 나눔

by 헌책방 2022. 1. 15.

[재인, 재욱, 재훈 - 정세랑] 작은 힘의 나눔


기술이 발전하고, 생활이 편리해질수록 기댈 곳이 사라져 방황하고,
방황 끝에 넘어져 구조를 기다리는 존재들이 많다는 점이 서글프다.
산업 발전이 낳은 기후변화는 쪽방촌에서 보일러도 에어컨도 공기청정기도 없이 보호자의 퇴근을 기다리는 어린 아이들에게는 대재앙이고,
마트에서 생리대를 구매할 경제력이 없는 소외계층 여성들에게는 생명을 잉태할 축복이 되는 생리가 한달에 한번 마주하는, 끝 모를 터널이다.
가진 것의 양은 나눌 수 있는 것의 질에 영향을 미칠 뿐, 나눔이라는 행위 자체와는 어떠한 연관성도 갖지 않는다.
친구와 카페에 마주 앉아 마시는 커피가 따뜻한 겨울이다.
이 한잔의 힘으로 누군가는 대재앙에서 탈출하고, 끝 모를 터널의 끝에서 부신 눈을 비빌 것이다.
작은 힘을 나누는, 누군가에게는 사소한 일이 누군가에게는 구원이 되는,
우리는 금방 따뜻해지는 차가운 세상 속에 있다.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자가 오히려 마주 잡은 손의 온기에 의해 구원 받는, 겨울 속에 있다.


한 해가 끝날 무렵에 학교와 자선단체들에서 이런저런 문자를 보내왔다. 숨 쉬는 것만으로도 돈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그것이 당연한 차가운 서울에서, 아직도 점심을 먹지 못해서 배 곯는 아이들이 있다. 그래서 몇년째 한달에 한번 소액을 기부하고 있는데 감사하게도 기부금영수증 발급 신청 방법과 기부금액 사용내역을 꼬박 꼬박 보내준다. 내가 술값을 몇 푼 아껴서 끼니를 해결할 수 있게 된 아이들의 이야기 덕분에 나 또한 늘 위로 받고 구원 받고 있다.


전세랑은 구조를 기다리는 사람이 수없이 많은 이 사회에서 당연하게도 구원자는 많을수록 좋고, 마블 영화에 나올만한 대단한 영웅은 아니더라도, 구조될 사람과 마찬가지로 구원을 기다리고 있는 평범한 사람이라도, 충분히 친절한 이웃 영웅이 될 수 있음을 끊임 없이 시사한다. <보건교사 안은영>에서 평범하지 않은 특질 때문에 소외된 삶을 살았던 은영이 작은 용기와 의협심으로 주변을 구하면서 스스로 구원 받았듯이 <재인, 재욱, 재훈>의 재삼남매도 각자 우연히 갖게 된 아주 사소한 초능력과 이웃에 대한 관심, 얼마간의 의무감으로 주변을 구하게 되고 인생의 의미를 찾게 되면서 스스로도 구원 받게 된다. 특히 각자의 방식으로 아버지의 폭력적 무관심과 배반에 시달리던 어머니를 구하면서 그들도 오랜 짐에서 해방된다.


슈퍼히어로는 없다. 스크린 속에서나 도심을 웹스윙으로 누비고, 천재적인 기술력으로 만든 수트를 입고 사람을 구하는 그들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대신 현실에는 주어진 바에 최선을 다해서 업무를 수행하고 한 조직과 그 조직을 이루는 구성원들, 그리고 그 구성원의 가족들을 구하는 평범한 회사원, 커피값을 아껴 동문을 위해 매달 기부금을 내고, 술값을 아껴 어린 아이들에게 밥을 보내는 일반 시민 히어로들이 있다. 구원 없는 세상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누군가를 구조하고 스스로 구원 받는 자들이 있어서, 오늘도 세상은 헐거운 톱니바퀴에 의지해서 느리지만 꾸준하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재인, 재욱, 재훈, 은영들이 최선을 다해 사소한 초능력을 부리고 있다. 감사한 일이다. 작은 포옹, 짧은 말한마디로 엄마를 구하자, 아빠를 구하자, 동생들을 구하자, 친구들을 구하자. 나도 오늘 누군가를 구하러 간다. 추운 겨울 기댄 온기로 그도 나를 구할 것이다. 서울 거리는 오늘도 빛과 사람으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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