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발란 솔리스트 비노 바리끄 후기] 자유의 맛
(KAVALAN VINHO BARRIQUE)
베토벤의 Piano Concerto No. 5 in E-flat Major. Op. 73 'Emperor' (피아노 협주곡 5번 E-flat 장조, 작품. 73 '황제')는
작품 특유의 위풍당당함과 몰아치는 듯한 우렁찬 음향 때문에 후대에 '황제'라는 부제를 얻었다.
그러나, 정작 베토벤은 프러시아계를 압도하면서 진군한 나폴레옹 때문에 베토벤의 후원자였던 루돌프대공이 몸을 피하면서 자금 후원이 끊겼다는 현실적, 정치적 이유와
무엇보다 세계를 제패할 수 있는 권력, 나폴레옹이 통치의 방식으로 선택한 압제 보다 우선하는 가치가 있다는 신념 때문에 나폴레옹을 경계했고,
이 작품에서 베토벤이 품고 있었던 자유, 평화, 사랑만큼 소중한 가치는 없다는 가치관을 느낄 수 있다.
자유는, 베토벤이 그린 음표처럼 휘몰아치는 투쟁 끝에 찾아오는 잔잔한 론도다.
자유는, 긴 시간 보리가 자라고 증류와 발효, 특별한 캐스크에서의 긴 잠을 거쳐 닿는 카라멜 색, 특별한 꿈이다.
자유는, 강렬한 첫인상과 텁텁한 나무맛과 씁쓸한 산미의 소용돌이 끝에 혀 위에 남는 달콤함이다.
자유를, 당연한 것을 잃을 위기 앞에 서 있는 모든 위태로운 존재들 앞에.
지금의 이 소용돌이가 잔잔한 론도를 위한 과정이 되기를. 평화가 오기를. 기도한다.
요즘 의외로 사람들이 읽고 오 재밌다! 하고 반응해주는 소재가 위스키인데, 잊지 않으려고 적고, 내가 나중에 읽으려고 쓰는 글들이지만 반응이 좋으니 왜인지 계속 술 이야기를 하고 싶어진다. 그래서 내가 지내고 있는 곳의 지역적 특성상 바를 자주 찾긴 어렵고, 집에서 마시는 위스키는 흔한 것들이라 사진첩을 뒤지다가 예전에 마셨던 위스키를 안 생생하게 리뷰해보기로 했다. sns에 정치적 견해를 적는 것이 가장 바보 같은 짓이라고 생각하지만 누군가의 자유를 응원하는 것은 정치적 견해와 다른 문제니까, 설명으로 응원해볼까 해서 요즘 연일 뉴스를 달구고 있는 국가, 대만의 위스키에 대해서 리뷰해보려고 한다.
저숙성 CS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을 아무래도 취소해야할 것 같다 싶은게 몇 개 안되는 리뷰를 쓰면서 계속 저숙성 CS에 대해서 좋게 평가하고 있다. 킬호만 포트 쿼터 캐스크 피니시 한국 한정판 싱글 캐스크가 그랬고, 킬커란 CS 배치4는 정말 정말 좋았다. 그리고 무정형 가면 이미 꼬인 혀로 "균미나... 나 쏠리스트...ㅠㅠ" "솔리스트 뭐;;;;;" 하면 "아무거나 다 좋아ㅠㅠㅠ""(절레절레 저 진상 왜 집에 안 감;)" 하는 대만 카발란 증류소의 솔리스트 시리즈도 모두 저숙성 CS다.
카발란 증류소는 2002년, 대만 내 사기업의 증류소를 금지하는 법이 사라지면서 2005년에 창립됐다. 카발란 증류소 또한 일종의 자유의 상징인 셈이다. 그리고 2009년부터 위스키를 생산했으니, 위스키를 만든지 13년쯤 된 증류소에서 고숙성 CS를 출시할리 만무하다. 당연하게도 솔리스트도 NAS(None Aging Statement, 숙성 년수 표기 하지 않음)로 출시된다. 그러나 시리즈 모두 세계 유수의 증류소의 질 좋은 고숙성 CS 못지 않은 맛과 풍미를 자랑하며, 솔리스트 시리즈의 히트로 카발란 증류소는 20년이 안되는 짧은 시간만에 세계적인 증류소가 되었다.
카발란 위스키의 저숙성 CS가 타 증류소의 고숙성 CS 같은 풍미를 자랑하는 것에는 대만의 아열대 기후가 큰 영향을 미친다. 서늘하고 습한 스코틀랜드에 비해 대만은 기온이 높고 습해서 위스키의 증발량이 스코틀랜드의 약 10배에 이른다. 증발되는 양도 많고 증발 속도도 그만큼 빠르니, 고숙성 CS를 만드는 것은 일단 이해타산에 맞지 않고, 그 대신 숙성이 빨리 진행되어서 짧은 숙성에도 캐스크의 특성이 위스키에 빨리 배어들 수 있게 된다. 카발란은 그래서 저숙성 CS를 뽑는 대신 오크통을 만들 자재를 고르고 제작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인다. 오크통이 위스키 숙성에 최적화 되도록 트리트먼트 과정까지 거친 후 5층이나 되는 숙성고에서 위스키를 숙성한다. 특히 요즘엔 셰리주(셰리 와인)를 병입한 후에야 스페인 밖으로 유통할 수 있도록 스페인 법이 바뀌어서 스페인 영역 밖에서 셰리를 숙성한 오크통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와 같이 어려운데, 카발란에서는 이 점을 극복하기 위해 아예 셰리를 담아 3년 정도 숙성한 후 그 오크통을 활용하는 전략을 쓰고 있다. 이런 정성을 들이고 있으니 카발란은 당연하고, 카발란 뿐 아니라 다른 증류소의 셰리캐스크 숙성 위스키 가격은 더 오를 예정이니 지금 많이 먹어두자. 카발란 라인업은 싱글 캐스크 스트렝스(Single Cask Strength, CS이긴 한데 싱글 캐스크 CS. 즉, 한개의 캐스크에서 숙성한 위스키만 물을 섞지 않고 병입한다는거다. 당연히 엄청 찐하고, 고도수일 수 밖에 없고, 그래서 많은 위스키 매니아들이 카발란 라인업 중에서 솔리스트에 가장 열광하는 것이다.)인 솔리스트 시리즈, 퍼스트 필 캐스크(무엇인가를 숙성한 캐스크에 처음 채워 숙성한 위스키를 이야기하며, 당연히 위스키에 캐스크의 특성이 생생하게 녹아들어 있을 수 밖에 없다.) 만 사용하는 카발란 시리즈, 세컨드 필 캐스크(도 퍼스트 필보다는 덜하겠지만 위스키에 캐스크 특성이 잘 녹아들어 있을 수 밖에 없다.) 를 사용해 숙성하는 디스틸러리 셀렉트 시리즈, 다른 시리즈보다 부드럽고, 저도수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오케스트라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름을 가진 콘서트마스터 시리즈, 그리고 디스틸러리 리저브 시리즈까지 총 다섯가지이다.
"아무거나 솔리스트 다 조아ㅠ.ㅠ엉엉"해서 이날 마시게 된 것은 비노 바리끄. 비노와 바리끄는 어감에서 느껴지듯 각각 와인과 캐스크라는 뜻이다. 싱글 캐스크 스트렝스 제품으로 NAS라 숙성기간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6년 정도 숙성한다고 한다. 화이트와 레드 캐스크를 모두 사용하는데 어떤 와인인지는 정확히 알려진 바 없다. 거듭 설명했지만 위스키는 숙성한 캐스크마다 특성이 다르기 때문에 같은 라인업이라도 위스키마다 도수, 풍미 등 특성이 다를 수 밖에 없다. 이 제품은 55.6도로 비노 바리끄 중에서도 온도가 낮은 축에 속하고, 바틀넘버는 009/142로 확인했다. 사실 여기까지 정보 확인하고 나서는 보통의 CS겠거니 생각하면서 멍했는데, 142병 병입했다니 정말 작은 캐스크를 쓴 것 같아서 조금 기대하게 됐다. 캐스크가 작을수록 숙성 속도가 빠르고 풍미가 고숙성 CS에 가까워져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카발란이 오랫동안 계속 솔리스트를 내줬으면 하는 것이 솔리스트도 버번, 셰리, 포트 와인, 기타 와인을 숙성한 캐스크를 다양하게 사용하기 때문에 배치별 개성이 굉장히 뚜렷하게 대비되고, 그만큼 소비자가 경험할 수 있는 바가 다양해지기 때문이다. 그 다양한 싱글캐스크 스트렝스 제품 중에서도 이 비노바리끄는 세계 위스키 어워즈에서 가장 뛰어난 싱글 몰트 위스키라는 영예를 안으며 카발란을 세계적 증류소의 반열에 오르게 한 일등 공신이다. 직후에 쓴 후기가 아니기 때문에 더듬더듬 기억에 의존해 이야기해 보자면, 무엇보다 휘몰아치는 것 같은 강렬함이 기억에 남는다. 도수는 다른 CS보다 (아주 약간이긴 하지만 그래도) 낮지만 천장을 때리는 듯한 타격감이 인상적이었다. 뾰족하지는 않지만 선이 굵은 느낌이랄까. 비노 바리끄라는 특성을 의식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와인 특유의 과일 향과 타닌이 강렬한 첫인상을 남기고 우디한 바디감이 그라데이션 되다가 마지막은 역시 달콤함으로 마무리 된다. 탁탁 친다는 느낌까지는 아니었지만 경계가 희미한 정도는 아니어서 좋았다. 피니시가 달콤쌉씨름하지만 꽤 드라이한데 뚝 끊기지 않고 여운이 길다. 탁탁 치고 가는 느낌은 아니다 보니 앞서 지나간 노트들이 남아서 여운이 길어지는데 기여한다. 저숙성 CS지만 색깔도 꽤 진했고, 이 전에 위스키를 두 잔 한 상태였는데, 앞선 위스키 인상을 정리할 만큼 강렬했다. 내 기준 다이나믹은 조금 떨어지지만 잔잔바리로 다이나믹한 것보다 이렇게 큼직큼직 우직한 스타일도 좋다.
돌이켜보다보니 나도 모르게 입맛을 찹찹 다시게 된다. 대만 갔을 때 괜찮은 바에서 시가랑 위스키 조합을 즐기지 못했던 것이 내심 아쉽다. 카발란에 절여진 채로 살다 왔어야 했는데. 나는 마음 놓고 비노바리끄를 마실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싶다. 위스키의 역사는 자유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누군가의 눈에는 단순한 술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금주법을 뚫고 스픽 이지에 몸을 숨겨 살아 돌아온 위로고, 누군가에게는 집념으로 만들어 낸 캐스크에 담긴 희망이고, 누군가에게는 눈물로 만든 원액으로 빚은 자유다. 힘이나 돈보다 중요한 가치를 이끄는 힘이다. 오늘도 자유를 위해 투쟁하고 있을 모든 존재들이 언젠가 이 순간을 안주 삼아 위스키 잔을 기울일 날이 올 것이라고 믿는다. 모두가 그저 스스로를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날이 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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