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북리뷰39

[기특한 나 - 천선란] 자신 / 북 리뷰, 북 에세이 feat. 월디페 2022 [기특한 나 - 천선란] 자신 눈물이 다 나네잉. 나래야 정말 잘했다이, 잘혔어. 아빠와 나는 동네가 떠나가라 소리 지르면서 춤을 추고 있었다. 수능을 보고 집으로 돌아온 날 저녁이었다. 엄마는 부엌에서 고기를 굽고 있었고, 아빠와 나는 작은 방에 앉아서 같이 채점을 했다. 내 친구들은 이 이야기를 할 때마다 글자 그대로 극혐한다. 아니, 어떻게 아빠랑 수능 시험지를 채점해? 나는 20대가 되기 전까지 만해도,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하는 질문에, 그게 왜 궁금하냐? 또는 그것도 생각이냐? 하는 날카로운 반문 대신, 음. 나는 아빠! 라고 대답하는 부류의 딸이었다. 고등학생이 되어도 아빠랑 껴안고 뽀뽀할 수 있고, 주말이면 아빠 팔을 베고 누워 낮잠 자는 것이 가능할 정도로, 아빠와 나는 가장 친한.. 2022. 8. 20.
[밤으로의 긴 여로(Long Day's Journey into Night) - 유진 오닐] 무적(霧滴) 속, 무적(霧笛). [밤으로의 긴 여로 - 유진 오닐] 무적(霧滴) 속, 무적(霧笛). Long Day's Journey into Night 엄마가 동생이 한 명 더 태어날 거라고 예고한 날을 잊지 못한다. 당시 엄마 나이로서는 이미 노산이었던 데다가, 그로부터 2년 전 쯤 임신 후 안정기에 들어섰을 때 갑작스러운 유산을 겪은 적이 있어서 기쁨보다 걱정이 앞섰다. 동생을 기다리던 나와 루나에게도 그 일은 일생일대의 충격이었다. 엄마가 병원으로 실려갔을 때 하필 아빠가 출장 중이어서 내가 보호자로 병원을 따라갔었다. 속절 없이 무너지는 엄마 곁을 지키면서 다시는 동생 생길 일이 없겠구나 생각했었는데, 그런 일을 겪고도 동생이 태어난다니 믿기 어려웠다. 지금은 두 분이 의 60대 한국인 편을 찍고 있지만, 그때는 부모님의 애정.. 2022. 8. 9.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등 7편 - 김초엽] 모호의 명확성에 대하여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등 7편 - 김초엽] 모호의 명확성에 대하여 주변의 모든 이를, 심지어 떠나가고 떠나온 이들까지 사랑하지만, 특히 더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다. 며칠 전 날짜가 바뀌는 새벽의 틈에 지금 당신의 마음을 얘기해 주세요. 하고 카톡이 왔다. 종종 삶과 관계, 사랑과 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단골 바 겸 식당 사장님이었다. 어쩐지 마음이 짓궂어져서 일기를 찍어 보냈다. 작은 방에 에어컨을 켜면 삽시간에 사방이 얼어붙는다. 책장 위에 다닥다닥 붙어 서로의 체온을 나누는 책들의 표피에도 오도도 소름이 돋는다. 아 비로소 여름이구나. 이기적인 인간은 생각한다. 유치한 일기를 찍은 성의 없는 사진으로 답변을 대신하자, 그가 오늘은 슬픔에 잠기는 날이라고 고백했다. 사랑은 양.. 2022. 8. 2.
[그러나 혼자만은 아니다 - 시몬 드 보부아르] 자유의 터 [그러나 혼자만은 아니다 - 시몬 드 보부아르] 자유의 터 엄마는 이십오 년 동안 전업주부였다. 외 증조할아버지는 선비이자 지역에서 마지막 남은 서당의 훈장님이었고, 외할아버지는 공무원이자 부동산 투자에 탁월한 안목을 지닌 분이었다. 물론 엄마는 그 시절 여느 가정에서 흔했던 풍경처럼, 외삼촌과 세 명의 여동생들을 위해 대학 진학을 포기했지만, 당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덕분에 서울에서 잠시 일했던 순간을 빼고는 생계를 위해서 일해야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녀가 스물 일곱이 되던 어느 날 외할아버지는 교육을 갔다가, 어깨에 빵과 우유가 가득 든 상자를 짊어지고 선배들에게 그을린 팔을 내밀며 척척 간식을 배분하는 청년을 보았다. 얼굴이 낯 익어 청년에게 혹시 자네 나를 아는가. 했더니 청년이 학창 시절에.. 2022. 7. 29.
[수브다니의 여름휴가 - 김초엽] 해변 끝의 카프카 [수브다니의 여름휴가 - 김초엽] 해변 끝의 카프카 야이. 너 이 xx oo 완전 꼰꼰대네. 아 선배님, 저 꼰꼰대는 맞는데요. 후배한테 xx, oo이 뭐예요? 교양 없게. 아니 그리고 그 xx가 남자 선배랑 여자 선배 대하는 태도가 서로 다른 것이 문제지, 내가 선배라고 무조건 대우해달라는 것이 아니라니까? 나보다 나이 많아도 후배니까 무조건 군기 잡겠다. 뭐 그런 마음이 아니라니까요? 오랜만에 만난 선배가 내 눈을 빤히 보더니. 많이 세졌네. 막둥이 놈이. 하면서 갑자기 웃음을 터뜨린다. 웃을 문제가 아니라면서 샐쭉이다가 그를 따라 웃었다. 내가 권위 중심적으로 사고하는 진정한 꼰대라면, 그에게 대들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면 후배에게는 권위적으로 행동하고 선배에게는 대드는 내로남불형 인간이거나. 후자.. 2022. 7. 20.
[천 개의 파랑 - 천선란] 삼천 개의 빗방울 [천 개의 파랑 - 천선란] 삼천 개의 빗방울 비가 오니까 너도 오는구나. 이별 후에 유독 새벽이 길어졌다. 머리만 대면 잠드는 편인데, 베개에 불면이 숨어 있었는지 박명 사이로 자꾸 뒤척임이 스민다. 지난밤 꿈에는 너의 모습이 말도 없이 제멋대로 찾아와 까만 밤과 새벽 틈 사이에서 눈을 떴다. 투두둑, 발코니 철제 난간에 정신없이 빗방울이 내려 춤추고 있었다. 너와 나란히 앉아 이별을 말할 때 함께 보았던 하늘에 걸린 회색 장막에, 삼천 개의 물방울이 맺혀있었다. 그날 차마 내리지 못했던 그것들이 빗방울이 되어 펼친 손위로 나렸다. 처마 끝에 매달려 나리는 빗속으로 오목하게 손바닥을 반쯤 쥐고, 목놓아 너의 이름을 불렀다. 너도 너의 맘대로 꿈속에 왔듯이. 내 맘대로. 주책맞게도 빗방울 소리를 손에 담.. 2022. 7. 19.
반응형